저작(咀嚼)과 저작(著作)
어느새부터 턱은 미련함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는 영양분을 효율적으로 흡수하기 위해 음식을 잘게 부수는 저작(咀嚼) 운동을 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턱 주변의 근육인 저작근이 발달하고, 이는 치아 건강뿐 아니라 얼굴의 인상도 결정한다.
관상학에서는 발달한 저작근을 건강하고 든든한 인상으로 해석하며 말년의 운 혹은 재물운을 가져다준다고 본다.
무언가를 오래 씹는다는 것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근육을 쓰고, 온 감각을 동원해 삶을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방식이었다.
음식은 오랫동안 꼭꼭 씹어야 소화가 잘 되듯, 말과 생각 그리고 문장도 꼭꼭 씹는 과정이 중요하다.
깊이 있는 표현은 충분한 저작(著作)의 결과이다.
날 것의 생각을 다듬고 문장을 오래 씹는 자만이 진짜 표현에 닿을 수 있었다.
창작이란 고통의 연속이지만 결국 씹은 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턱에 보톡스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오랜 노력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다.
갸름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위해서
씹지 않는 얼굴을 만들기 위해서
이제는 많이 씹는 사람보다 씹지 않는 말끔한 사람을 동경하기 시작한다.
“왜 씹어야 하죠? 한입에 삼키면 더 편한데.”
반복되는 퇴고의 과정, 밤새 뒤척인 사유의 과정보다
AI가 뱉은 한 줄이 더 빠르고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추구한다.
깊이 대신 속도를
문학성 대신 생산성을
이제는 그 누구도 저작의 흔적에 경외심을 갖지 않는다.
창작은 땀이 아니라 출처 없는 편집이 되었다.
저작권이라는 이름은 상업적 방해물 정도로 취급되고,
이는 씹는 권리를 상실한 시대를 상징한다.
창작자의 사유는 Ctrl C와 V에 깔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밤새 물고 늘어진 문장을 다른 누군가는 아무 감각 없이 사용한다.
표현력이란 단어는 이제 생각의 깊이가 아니라 콘텐츠 유통의 기술이 되었다.
노력의 무게는 삭제되고 오로지 결과만 재가공된다.
커져버린 근육은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었고
창작의 수고는 도태의 상징이 되었다.
이제 사회는 ‘씹지 않고도 잘 삼키는 것’을 능력이라 부른다.
근육 없는 턱, 고통 없는 문장, 생각 없는 공유.
과연 이것이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인가?
여전히 우리들은
베토벤의 선율에 숨을 고르고
한강의 문장에 눈시울을 붉히며
덕수궁을 걸으며 스며든 햇살에 취한다.
진짜 아름다움은 언제나 그랬다.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마음을 울리는 것은 깊은 근육 속에 숨었고
시간의 밀도를 통과한 끝에 수고와 인내의 흔적을 입고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씹는다는 건 단지 섭취의 문제가 아니다.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소화의 과정이다.
창작 또한 마찬가지이다.
'감히 이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고통의 과정이다.
저작권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씹을 권리
사유하고, 숙성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조용히, 그러나 철저히 포기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