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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mtip Nov 21. 2023

'연극'이 끝나고 난 뒤- 1

첫 눈 내리던 날

"그럴 줄 알았지. 평소에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거랑 달라요. 더 멀리 가보세요."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더 멀리, 내 얼굴이 희미해질 때까지" 더, 더, 더 더 뒤로.  

한 걸음씩 뒤로 갈 때마다 입고 있던 옷을 한 겹 씩 벗어던지는 기분이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아니 점처럼 되다 마침내 사라질 때까지  내가 멀리간대도 할 수 있을까.

목소리를 내는 일. 내 말이 그녀에게 들리게 하는 것.

오늘 나의 몫은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다.


"자 됐어요. 멈추세요. 그 정도면 되겠죠. 내가 먼저 할게요"

"아!" 내 귀로 그녀의 목소리가 지나간다.


내가 답한다.

"아!" 그녀의 귀에도 내 목소리가 지나갔을까.

"아니, 전혀 들리지 않아요." 더 크게 더 크게.


"아!!!"

좋아요. 이제 조금 알겠어요. 야,라고 했죠.

나는 대답한다. "네" 그리고 용기 내 말한다.

"못하겠어요" 이게 전부예요.


그녀가 말한다. 아니에요. 전부 아니에요.

지금 못하겠다고 아주 정확히 말했고 나한테 들렸어요.

그렇게 다 체념한 듯 말하면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울림을 끌어내보세요.


체념한 듯 말하라.

온 힘을 다해 ,라고 말하는 건 최선을 다하는 건데 그게 어떻게 포기한 상태란 말인가.

힘을 빼면 들리고, 힘을 모으니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발뒤꿈치를 들어봐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손을 넓게 벌려봐요."

나는 대답한다 "못하겠어요." 그녀가 껄껄껄 웃는다.

"바로 그거예요. 지금 그 못하겠다는 심정으로 다시 해보세요."

"자, 내가 먼저 할게요. 나보다 더 크게 말해요."


나는 팔을 양 옆으로 벌린 후 발꿈치를 들고 외마디를 외친다.

"아!!!"

뒤통수를 타고 묵직한 소리가 목을 울린다.

관통한다.  

왈칵. 눈물이 흐른다.


"아!, 아!, 아!"

소리가 아닌 마음이다. 마음을 내보이라는 거구나.


눈물을 감추려 뒤돌아서니

눈이 내린다.

그래 맞아. 오늘 눈이 내린다고 했지.


단풍이 떨어진 나뭇가지가 앙상하다고 그 나무가 죽었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꽃병에 잘 담긴 예쁜 꽃들은 그렇게 활짝 펴 향기를 내뿜는데도 곧 죽을 것이라고 하지.

목소리를 내지 못한 예쁘게 화장한 나는 죽어있는 꽃과 같아. 마르고 말라 볼품없어져도 끊임없는 생명력을 갖고 싶어.


그녀의 재촉에 나는 계속해서 마음을 지른다. 그렇게 올해 첫눈 내리던 날. 목소리에 마음을 실어 소리 내는 연습을 한다. 덜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뜨끈한 슬픔이 겹쳐진다.


소리 내는 연습을 하러 왔는데 왜 눈물이 날까요.

그녀가 껄껄껄 웃는다.


눈물이 나야 마음이 열리니까,

마음이 열려야 제 목소리를 내지.



그녀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나가다 말고 다시 뒤돌아 온다.

내 어깨를 툭툭친다.

"됐네요. 무대에서 어떻게든 되겠죠. 내일 봅시다."






<최백호-정승환, 나를 떠나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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