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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mtip May 19. 2023

Dancing in the rain

하이데거의 숲

툭 툭 툭.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료하게 턱을 괴고 강의를 듣고 있다가 가까이 비를 보려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마침 창가에 앉길 잘했네, 수업이 끝나면 좀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니 강의가 더 지루해졌다.


대학에 입학해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곳은 정문에서 멀지 않은 하이데거의 숲이다. 봄날에 하이데거의 숲에 앉아있으면 글자 그대로 꽃비를 맞을 수 있다. 나무로 된 의자와 테이블 위에 한가득 벚꽃 잎이 쌓이고 비가 내리면 꽃잎들이 빗물에 둥둥 떠돌다가 한 곳에 수북이 쌓이기도 한다.


독일의 철학자 이름을 따서 숲의 이름을 짓다니.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뭐 사실 숲이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어쨌든 그 속에 앉아 있으면 한 글자도 모르는 독일의 실존철학에 대해 헴 하고 말할 수 있는 철학자가 된 느낌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비냄새를 맡으며 후문 쪽 5호관에서부터 본관을 지나 하이데거의 숲으로 갔다. 우산을 쓰고 살짝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손끝으로 비를 만지작 거렸다. 빗소리에 취했다. 비가 내리면 하이데거의 숲 군데군데 꽤 큰 물웅덩이가 생기곤 했는데 첨벙 청범 걸을 만큼 물이 찼다.


물웅덩이를 들여다보다가 무심결에 샌들을 벗었다. 발끝으로 살짝 물을 건드리니 물이 조그마하게 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우산을 내려놓고 샌들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걸었다. 물을 발로 차기도 하고 비를 맞고 흠뻑 젖도록 걷고 뛰었다.


시험기간이 거의 끝나서 그랬는지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 한적했다. 조용한 하이데거의 숲에서 그렇게 맨발로 다녔다. 뛰었던 건지 걸었던 건지, 그 중간쯤인 들뜬 모양으로 나는 춤을 추었던 것 같다.


대학이 별거 아닌데 별거네하는 생각을 그날 했다. 마음 졸이며 공부한 적은 없지만 막상 대학생이 되니 고등학교 내내 달려온 시간들이 우스울 만큼, 딱 그만큼이 대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강의를 내내 들으며 이런 게 어른이 되는 과정인 건지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부터 캠퍼스는 나에게 비 맞을 공간과 춤을 출수 있는 무대를 내어주는 곳이 되었다. 더 어른이 되어서도 비가 내릴 때마다 그날의 공기와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온다. 어둑한 캠퍼스에서도 느껴지던 초록들이 선명히 그려진다. 그리고 그날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던 유재하가 떠오른다. '가리워진 길'을 부르며 비와 유재하만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을 거라고 확신했던 날. 한기가 몰려와 덜덜 떨면서도 허름한 술집에서 술 한잔을 마시며 계속 웃음이 나왔던 날.


드디어 대학생이 된 걸 자축했던 나만의 기념일이다.


사진출처: third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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