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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한 주노씨 Dec 01. 2018

사투리 알쓸신잡

언어의 사회학 by 영남사람 & 호남사람

"어디서 오셨어요?" "서울에서 왔어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온 다양한 게스트들을 만났다. 그 분들과 많은 대화를 하다 보니 국문학자도 아닌데 지역별로 재밌는 발음 습관을 잡아내는 능력이 생겼다. 특유의 억양이나 어미사용으로 누가봐도 어디서 오셨는지 아는 분들은 제외하고, 서울/경기에서 오셨다는 표준어 쓰시는 영호남분들을 맞추는 나만의 노하우는 이렇다.


가령 목요일에 방문하신 게스트 분께 내일이 무슨 요일이냐 물을 때, [금뇨일]이라 발음하시는 분은 무조건 영남분이다. 월요일[워료일], 금요일[그묘일] 같이 연음법칙이 적용되야 할 단어에 자음접변(순행동화)이 일어나는 특징이 있다. 예전 삼성라이온즈의 포수 진갑용[진가뵹]은 경상도에선 진갑용[진감뇽]이다.


서울사람인줄 알았는데 호남분인 걸 알아채는 결정적 힌트는 격음화 무시다. 가령 서귀포시 법환동[버판동]을 [버반동]으로, 답답해[답다패], 곱하기[고파기] 역시 [답다배], [고바기]로 발음하는 원리와 같다. 격음화 대신 연음화가 일어난다. 8090 가수 박학기[바카키]는 전라도에선 박학기[바가끼]다.


표준어에 가장 민감해야 할 상당수의 지역방송 아나운서들도 이 습관은 고치기 힘든 듯 하다. 그렇다면 그렇게 발음하시는 이유가 뭘까? 가설 세우기 좋아하는 개인적 성향 상, 다소 일방적이고 검증할 순 없는, '그럴싸한 억지논리'는 다음과 같다.


부드럽게 넘겨야 할 받침을 끝까지 포기안하고 발음을 하다보니 영남분들은 다소 까칠하시거나 논리적으로 따지는 성향이 언어습관에 반영된 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경북 안동 분이신 우리 아버님이 내 이런 가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셨다.

반대로 호남분들은 ㅋ, ㅌ, ㅍ 같은 격한 소리(=격음)에 거부반응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왠지 주위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고, 싸우기 보단 스리슬쩍(=비속어인 '유드리'있게) 넘어가고픈 무의식적 성향이 언어로 발현된 건 아닐까? 사투리를 잘 못고치는 영분들에 비해 호남분들이 표준어를 상대적으로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유도 일맥상통한다. 오랜 기간 기득권을 누려 온 영남분들은 사투리를 고치지 않아도 사회생활 하는데 불편을 겪지 않은데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받았던 호분들은 사투리를 쓰면 차별을 받았던 말도 안되는 경험들이 있기에, 표준어를 체득하는데 더 적극적으로 노력했을테니...


부족한 논리엔 자고로 위인들의 말씀을 들먹이는 법. 팔도사람들의 특징을 이성계 앞에서 사자성어로 표현한 삼봉 정도전의 말에서 추가 근거를 찾아보자. 삼봉 선생은 경상도를 태산교악(泰山喬嶽 : 큰 산과 험한 고개처럼 선이 굵고 우직하다)이나 송죽대절(松竹大節: 소나무 대나무 같이 곧은 절개가 있다)로, 전라도는 풍전세류(風前細柳: 바람결에 날리는 버드나무처럼 멋을 알고 풍류를 즐긴다)라 비유했다.
절개있는 사람이 좀 까칠해 보이고, 풍류를 즐기는 사람은 일단 유해 보이지 않은가? 굳이 앞에서 다룬 '언어의 사회학'(음 근사해, 부제목으로 낙찰!)적 고찰과 연결해 보면 뭐 황당무개한 논리만은 아닌 거 같다.^^;;;


내가 이주한 이 곳 제주에도 독특한 발음 규칙이 있다. ㄴ이나 ㄹ이 ㅎ을 만나면 ㅎ을 먹어버린다. 가령 올해는 [올래], 일학년은 [일락년]으로 발음된다. '전나전나'하며 핸드폰을 건네시던 이웃 분이 순간적으로 욕을 하는 줄 알고 오해했던 기억이 난다. 제주어 중 또 하나 재밌는 특징은 'ㅏ'발음이 'ㅗ'로 나는 거다. '바람'을 제주토박이 분들은 [보롬]이라 발음한다. '아래아'의 영향이란 설명은 왠지 공허하다.

바람을 [보롬]이라 말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 바람 때문이다. 말소리 또한 세찬 제주바람에 날려 사그러진다 해서 퍼지는 'ㅏ' 발음 대신 모이는 'ㅗ' 발음으로 소낸다는 거다. 상당히 과학적이다. 촛불을 끌때 우리가 입술을 모아 바람을 부는 원리와 같다.


생각이 말을, 말이 행동을, 행동이 습관을, 습관이 성격을,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 어쩌다 보니 표준어의 정의가 교양있는 서울사람이 쓰는 말이 됐지만, 무슨 사투리를 쓰건 간에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단어를 취사선택해 자기의 생각을 명료하게 말하는 사람은 무조건 매력적이다.


참고로 난 경중미인(鏡中美人: 거울 속 미인처럼 우아하고 단정한) 경기도 사람이다.


SE) 슉슉(돌 날라오는 소리)




제주돌집 탱자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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