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Panther, 2018
솔직히 '블랙팬서'는 히어로 영화, 혹은 액션 영화로 보자면 좀 실망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히어로의 능력을 보여주는 시퀀스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아 이미 많은 히어로들을 접한 관객들을 사로잡기엔 매력이 부족하다. 이전의 MCU 영화들이 이미 매력적인 캐릭터와 기발한 액션 시퀀스를 많이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현실적이고 절실한 동기를 지닌 빌런이 등장해 주인공의 행보가 역으로 반감을 사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MCU의 히어로들은 각자가 지닌 힘과 능력이 아니라 각자가 믿는 가치에 의해 고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슈퍼 군인이 아니라 국가주의를 뛰어넘어 자신이 믿는 정의와 박애를 위해 싸우는 군인이 캡틴 아메리카가 되고, 천재가 만든 최첨단 무기의 집약체인 슈트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해 두려움과 싸우는 토니 스타크가 아이언맨이 된다. 마블의 첫 흑인 히어로 단독 영화인 '블랙팬서'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나름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블랙팬서가 대표하는 것은 단순히 빈민국으로 위장한 최강국 와칸다가 아니라, 아프리카 그리고 흑인 문화 전체다. 인종차별 문제는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는 성장담과 함께 갈등의 최전선에 선다. 스크린 밖 현실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를 과감히 끌어들임으로써, '블랙팬서'는 매우 비현실적인 설정들에 현실성을 불어 넣는다. 아마 이런 과감함이 없었다면, 영화는 '라이언킹'을 실사화한 것 같은 우화에 그쳤을 것이다. 특히 트찰라와 킬몽거 간의 가치 충돌은 각각 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의 사상을 대변하며 흑인 민족주의(Black nationalism) 내 이념 갈등을 떠올리게 한다.
인종주의 자체를 반대하며 다른 인종과의 공존을 주창하는 온건파와 흑인끼리 뭉쳐 흑인만의 나라를 세우길 원하는 급진파의 논리는 다소 도식적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블랙팬서'는 이 도식을 '자칫 폭력이 될 수도 있는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모든 히어로의 딜레마에 접목함으로써 흑인 히어로 고유의 서사를 창조해낸다. 흑인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기만 하고 기존 히어로물과 같은 이야기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알맹이까지 흑인의 이야기로 채워 넣은 것이다. 비록 결말에서 제시한 해결책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었지만, 진정한 와칸다의 왕이자 히어로로 거듭난 블랙팬서가 앞으로 이 서사를 어떻게 이어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