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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Apr 13. 2020

글래스(2018) - 다시 쌓아올린 히어로 서사

Glass, 2018

※ 직접적이진 않지만 결말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래스'에서도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여전하다. 이야기의 방점은 마지막 반전에 찍혀 있고, 결국 비밀이 담긴 꾸러미를 푸는 과정이 플롯의 중심을 차지한다. 안에 든 것이 드러날 때의 놀라움은 여전하지만, 내용물의 정체가 썩 만족스럽진 않다. 2시간 가까이 뭐가 들었는지 모를 꾸러미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 역시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글래스'에서는 전작인 '언브레이커블(2000)'과 '23 아이덴티티(Split, 2017)'가 이런 단점을 보완해준다.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은 복선으로만 기능하는 게 아니라, 전사에 대한 후일담도 되기 때문이다. 전작의 캐릭터들에 매력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그들이 훗날 어떻게 되었는지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데이빗 던이 자경단으로 활동하고, 그를 초인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아들이 성장해 사이드킥을 맡고 있는 모습은 꽤 흥미롭다.



나이트 샤말란이 생각했던 히어로와 빌런의 정반합과도 같은 역학 관계는 '글래스'를 통해 완성된다. 결국 빌런이 있기 때문에 히어로가 있는 것이고, 빌런이 존재하기에 히어로도 존재의 의의를 갖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과 비정상을 용인하지 않는 세상이다. '언브레이커블'과 '23 아이덴티티'를 통해 제시된 세계관은 '글래스'를 통해 완성된다. 부서지지 않는 남자 데이빗 던과 수많은 인격 중 잔인한 야수를 감추고 있는 케빈 웬델 크럼은 결국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미스터 글래스' 엘리야 프라이스에 의해 발현되고 존재를 알린다. 이를 통해 샤말란 감독은 히어로 서사를 구조적으로 해체하고 전형적인 관습을 뒤집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어딘가 망가진 사람들이 감시의 시선 속에서 각각 히어로와 빌런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결국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비롯된다. 



다만 이야기에 비해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은 아쉬운 점이 많았다. 충분히 매력적으로 묘사될 수 있었던 캐릭터들이 도구로만 활용된 후 가차 없이 희생되고 말았다. '글래스'는 슈퍼히어로 서사가 말 그대로 현대의 신화가 되어버린 현 시점에 충분히 유효한 이야기지만, 전복된 서사를 풀어놓는 데는 2000년작 '언브레이커블'로도 충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일각에서 '언브레이커블'을 시대를 앞서간 수작으로 재평가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글래스'는 흥미로운 상상력을 덧붙여 스케일을 키웠지만 과연 꼭 필요한 이야기였을까 싶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적어도 좀 더 그럴듯한 액션 시퀀스라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이전 작품들의 팬들 중 다수는 서사의 참신함보다 캐릭터들이 진가를 발휘하는 장면을 원하지 않았을까. '글래스'가 기존과 다른, 기존에 없던 이야기인 것은 맞지만, 어벤져스가 지배하는 세상을 전복할 만한 힘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적인 자극만으로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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