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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테크르르 Jun 22. 2020

안녕, 나의 옛사랑

그녀의 고향은 춘천. 그녀는 부산으로 공부하러 왔었다. 그녀는 나의 옛사랑이다. 유부남이 왜 옛사랑을 이야기하느냐 묻겠지만 우리 모두는 또 다른 누군가의 옛사랑이지 않던가. 


연애 시절을 되돌아보면 그녀만큼 나와 코드가 잘 맞았던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밀라노 워크숍에서 만나 한 달 동안 같은 숙소를 썼다. 운 좋게 같은 조원이었고 인연은 거기서 시작됐다. 서로 가식이 없었고, 씻지 않은 채 편안한 차림으로 주말 등산을 즐겼다. 입맛도 촌스러워 대학가 막걸리집의 파전과 고갈비를 사랑했다. 신종플루가 유행하던 시절, 병에 걸려 열이 끓는 그녀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기숙사와 격리를 위해 모텔방에서 보호자가 되어 바닥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사랑인 듯, 우정인 듯, 가족인 듯 끈끈했던 그녀와의 기억은 다양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녀가 서울대 대학원에 합격해 부산을 떠나던 마지막 날 밤. 그녀를 데리고 황련산 정상에 올라가 반짝이는 광안대교를 선물했다. 바람은 선선히 불어오고, 유난히 광안대교의 불빛이 반짝였다. 어린 나이의 유치한 장면이지만, 서로를 격려하던 그 날의 밤이 기억에 선명하다. 

'꼭 서울에서 만나자고'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별도 자연스레 우리를 찾아왔다. 


시간이 흘러 결혼 전 적어도 그녀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연락했다. 이기심 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번호를 지우기 전 마지막 연락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항상 쾌활했던 그녀는 나의 안부에 화답했고, 만남을 약속했다. 저녁 식사를 함께 했고, 용건을 말했다. 

"OO아. 나 결혼해"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어쩐 일로 보자고 하는지 했네. 축하해. "

한 없는 나의 이기심에 축하해주는 그녀를 보니 한편으론 안도되기도 했고, 한편으론 감정이 눅눅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헤어지던 순간 마지막으로 그녀가 나에게 고백했다. 

"나.. 사실 안 강해.  오빠가 정신력 강한 여자를 좋아해서 강한 척한 거야. 예전에 오빠랑 만나면서 얼마나 힘들었다고. (웃음) 그러니 이제 잘 가 " 

집으로 오는 길에 자꾸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예의인지 이기심인지 모르겠지만 연락처를 모두 지웠다.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그녀의 연락처. SNS 조차 하지 않는 그녀의 흔적은 더 이상 찾을 수도, 알 수도 없다. 찾을 이유도 없지만 말이다. 희미해지는 그녀와의 고리. 가끔 그녀가 생각난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라는 '대상'이 생각나기보다 그녀를 만나던 당시에 내가 느꼈던 '감정'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지나간 인연들이 아니라, 그로 인해 우리 안에 생겨났던 그 순간의 감정들이다. "


그녀가 소중한 것은 젊은 날 서로를 위로해주고, 함께 공감하고 감정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녀를 만난다 한들 우리가 얼마나 늙었는지 확인하고,  배우자는 뭐하시는지, 아이가 몇 명 있는지 정도의 안부를 묻지 않겠는가. 


우린 이미 과거에 그대로 존재하고 나의 감정과 기억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어렸고, 유치했지만 나의 감정과 느낌이 그녀를 존재하게 한다. 그녀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실은 중요하지 않다. 예전 감정 덕분에 그녀는 부산물처럼 함께 기억에 떠오르는 것이다. 연애 한 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 (하하.. )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두 기억되는 것은 당시 내가 느낀 감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너무 "X"라는 존재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녀는 떠나보냈지만, 당시 생겨났던 내 감정들마저 버리기엔 나의 인생은 즐겁고 애틋한 기억이 너무 많지 않은가 싶다. 역시 이래서 옛사랑 이야기는 재미있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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