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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시작하는 마음 Sep 08. 2022

여기서는 할 수 없는 게 많아.

매일 무너지는 내 마음

칠레에서 가장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 : 소고기 가격


하루가 매일 똑같다. 내 하루를 기록해본다.


아침 5시 40분: 기상, 아이들 도시락 준비, 아침 준비

아침 7시 30분: 아이들 등교, 남편은 아이를 등교시키고 어학원으로 감, 나는 집안일 시작

아침 9시: 잠깐 앉았다가 책을 보거나 마트에 생수를 비롯한 도시락 반찬, 생필품을 사러 감. 아니면 아이들이 읽을 전자책을 다운로드하거나 이메일을 보내는 등 집안 민원 처리

오후 12시: 남편 점심 준비 후 같이 식사, 휴식

오후 3시 : 저녁 준비, 남편은 아이들의 학교로 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옴

오후 4시 30분 : 저녁 식사(새벽에 일어나는 아이들을 일찍 재우기 위해 이른 저녁 식사를 함)

오후 6시: 아이들의 학교 숙제 지도 

오후 9시: 취침(여기 오니까 무척 피곤하다), 새벽에 자주 깬다, 아직도 시차 적응 중


금요일은 남편의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이라 오후에 일찍 저녁 준비를 해놓고 내가 아이들의 하교를 담당함.


뻔한 주부의 일상이다. 그래서 때로는 지겹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있다고 해도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더 그렇다. 휴대폰은 한국에서보다 더 조용하다. 없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을 만큼.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마트에서 장보는 것 정도만 가능하다. 여기에도 한국사람들이 있지만 딱히 시간을 내서 만나고 싶지는 않다. 칠레에 오면 싸게 골프나 치면서 한가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나는 티 나지 않는 집안일로 한국에서보다 더 바쁘게 지내고 있다.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은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외국에서는 더 실감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많았다. 남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별로 없었다. 여기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다. 남에게 도움도 자주 요청해야 된다. 그게 나는 제일 힘든 것 같다. 


칠레는 외국인등록번호(RUT)가 있어야 인터넷 쇼핑이 가능하다. 3주가 지났는데 외국인등록번호를 받지 못했고 언제 나올지도 모른다. 여기 물은 석회가 많아 마실 수 없어 생수를 사다 먹는다. 우리 가족은 하루에 6L의 생수 2통을 마셔서 매일 마트에서 2통씩 사 온다. 지인에게 두 번 정도 인터넷 주문을 부탁했으나 세 번째부터는 선을 넘는 것 같아 직접 사 오기로 했다. 손으로 들 수 없어서 한국에서 보기 힘들었던 바퀴 달린 가방을 하나 샀다. 


칠레 주부에게는 필수품


6L 생수는 정말 무겁다. 가지고 올 때는 별로 힘들지 않은데 뚜껑을 열고 물을 부을 때는 손이 덜덜 떨린다. 어제는 손목이 약한 내가 생수병 뚜껑을 열지 못해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까지 밥을 하지 못했다. 순간 화가 나면서 '내가 여기서 생수병 하나도 못 여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확 무너져 버렸다. 


애증의 생수통(출처: google)


학교에서 집에 돌아온 둘째가 "엄마 얼굴이 피곤해 보여요!"라고 했다. 한 가지 일이 더 있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소꼬리를 사서 꼬리곰탕을 하려고 잔뜩 기대하고 앱을 깔아서 주문까지 했는데 한국 카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떴다. 번역기를 돌려가며 얼마나 열심히 찾고 주문했는데.


그제는 아이들 하교를 시키면서 택시를 탔다. 그런데 택시 기사가 집을 찾지 못해서 집과 먼 곳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걷기 힘들다고 투덜대고 나는 하필 그날 전통시장에 갔다 와서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왔다. 화도 나고 아이들 앞에서 택시 기사에게 잘 설명하지 못하는 내가 창피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선택해서 와 놓고. 남편에게 투정부릴 수도 없다. 남편은 남편대로 고생이 많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할 수도 없다. 다들 사느라 바쁠텐데 내 이야기는 가벼운 투정으로 들릴 것 같다. 비행기를 두 번을 타야 한국으로 갈 수 있으니 섣불리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도 못하겠다. 칠레에 올 때 힘들었다.


나는 언제쯤 이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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