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시작하는 마음 Jan 11. 2023

나는 왜 태어났을까

큰아이의 생일에 드는 생각

오늘은 큰아이의 생일이다. 한국에서는 엄청 추울 때 태어났는데 칠레에서는 엄청 더울 때 생일을 맞았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특별하지 않나. 첫 번째 아이라서 그런지 큰아이가 태어나던 순간은 잊히지 않는다. 양가 부모님 모두 첫째 자식에게는 더 각별하다. 그걸 보면서 서운했던 적이 많았는데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다 이해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문득 자주 서운하다.


큰아이의 마음에 드는 생일 케이크를 샀다. 칠레에 오자마자 생일을 맞게 된 둘째 아이의 생일 케이크는 너무 달아서 한 번 먹고 버렸다. 속상하고 미안했다. 오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한인촌의 식당에 가던 중 우연히 발견한 빵집에서 케이크를 샀다. 케이크 모양이나 색깔이 한국의 그것과 비슷해서 눈길이 갔는데 계산할 때 보니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운이 좋았다. 한국 케이크 맛을 볼 수 있다니. 내가 더 기뻤다. 값이 비싸긴 했지만 큰맘 먹고 샀다. 큰아이의 생일이니까.


아이들의 생일에 남편은 아이들에게 말한다.

"너희들 낳느라 엄마가 고생하셨으니까 먼저 엄마한테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거 안다. 남편에게 고맙다. 근데 난 동의하지 않는다. 생일엔 생일 당사자가 제일 축하받는 게 마땅하다. 부모는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아이를 태어나게 한 거 아닌가. 엄마 뱃속에서 나오느라 고생했다고. 건강하게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네가 나에게 와줘서 행복하다고. 나는 그런 축하를 받고 싶었다. 


아이가 부모에게 낳아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부모가 아이에게 세상에 너를 낳아도 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부모의 선택으로 낳아놓고 낳아줘서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자신을 길러준 부모에게 하는 감사의 인사까지 금지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아이에게 나에 대한 고마움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내가 너를 낳고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고 말하고 싶지 않다.


미역국을 끓이면서 생각했다. 내 엄마는 나를 낳고 기뻤을까. 왜 나를 낳았을까. 살면서 힘들 때마다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왜 나를 태어나게 해서 이렇게 고생시키나. 이럴 거면 낳지 말지. 


부모님은 어릴 때 나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산부인과 가서 너를 떼어버리려다 말았다." 

나를 비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대체로 내가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했을 때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를 태어나게 해 줬으니 감사하게 생각하고 부모에게 더 잘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화가 난다.


내가 부모가 되면서 나의 부모님을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자식에게 이럴 수 있지.' 하는 생각에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숙제를 만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미역국을 끓이면서 잠깐씩 슬픔이 지나갔다. 

'엄마는 내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줬었나.'

'사소한 일로도 나를 축하해 준 적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을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생일 축하해!


오늘 큰아이에게 몇 번이고 축하의 말을 해줬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생일 케이크에 초를 켤 때, 자기 전에도. 아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자란 것이 기뻤다. 내가 고생한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려고,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기에 나에게 생명을 주었을까. 내 부모님은 나를 태어나게 해 놓고 왜 나한테 그랬을까. 그러고도 잘 살고 있는 걸까. 나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을까.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엄마를 용서할 수 있을까?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