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시트가 도착하면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뉴스브리프 주제가 들어있는 시트를 업체 측의 빅데이터 담당자가 후배를 통해 나에게 전달한다. 옛날에는 작성자가 알아서 뉴스브리프 주제를 선정했는데, 업체도 빅데이터 분석을 하겠다며 잔뜩 바람을 잡고 있다. 일감을 따내려고 정부 입찰 때 그렇게 허풍을 떨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쥐꼬리만 한 사업비 받아 놓고는 우리 같은 프리랜서들에게 수년째 같은 원고료를 지급하는 이 얌체, 양아치 같은 업체가 겉멋을 부릴 리가 없지 않은가.
빅데이터 담당자를 고용할 돈이면 우리한테 주는 원고료나 좀 올려줄 것이지. 군사 안보 전문가들이 절대로 일어날 일 없다던 우크라이나 전쟁이 기어코 몇 달 전에 터졌고,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지만 우리들의 노동의 대가는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아니, 오히려 깎였다. 이슈트렌드 고료가 5만 원에서 4만 원으로 무려 20%나 삭감됐으니. 다시 한번 더 부아가 뒤집혔다.나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업체 담당자에게 욕설을 진탕 퍼부었다.
그렇다고 이 빅데이터라는 게 쓸모 있는 놈인가? 일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시트에 든 것들을 보면 죄다 허섭스레기투성이다. 당최 뭘 고를 게 있어야지.시답잖은 주가 변동 이야기나 알 필요 전혀 없는 지방 뉴스들이 높은 연관성 점수를 받고 시트 상단에 올라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빅데이터 분석 대상에서 공신력 높은 유료 구독 매체에 실린 기사는 다 빠져나간다. 그런데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권역을 담당하는 나는 닛케이 아시아, 더 스트레이츠타임스(The Straits Times),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 같은 신문을 구독해 놓고, 거기서 정치 경제적 함의가 큰 주제를 고르니 산출물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기계가 사람을 따르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거다. 그게 바둑이야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수학적인 계산이 서는 게임이니까 인공지능이 이세돌을 이길 수 있었겠지. 컴퓨터란 게계산기 아니던가.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숫자놀음과 다르다. 기계가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문화의 소산이다. 구글 번역기가 '매생이 전복죽'을 어떻게 번역해 놨더라? "나의 모든 삶이 뒤집어졌다."로 옮겨놓은 걸 보고 나는 한참을 웃었다. 요 기계란 놈이 매생이를 매생(每生)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나는 그걸 의기양양하게 페이스북 담벼락에 박제를 해뒀다. "봐라! 인공지능은 인간 번역사를 결코 대체하지 못한다. 고로 번역사는 평생 직업이다."라고 뻐겨댈 심산도 있었다.
그런데 업체 담당자는 5건 중에서 두 건은 꼭 시트에서 고르라고 우리에게 닦달을해대니 돌아버릴 지경이다. 게다가 이 원수 같은 시트가 제때 안 오는 날도 잦으니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작성자들은 오후 1시까지 주제 선정을 완료해서 업체 측에 통보해야 했다. 오전 11시 이전에 시트를 보내준다고 했는데, 빅데이터 분석이 늦어지는지 시간을 못 지키는 일이 잦았다. 이놈의 주제 선정 시트가 언제 올 지 모르니, 아침에 뭘 하려고 해도 뒤가 간지럽다.
주제 선정 마감 시한을 고작 한 시간 남겨놓고 시트를 보내면 우리더러 어쩌란 말인가? 이런 경우 나는 시트를 받기도 전에 당일 작업분 뉴스브리프 10건 모두 알아서 적당한 걸로 골라 놓고, 업체 측에 미리 통보한다. 그래야 나도 내 할 일 할 수 있지 않은가. 저놈들은 내 아침 시간을 전세라도 놨는가?
이 사람들은 나와 고용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라서, 내 국민연금, 건강보험에 정말 1원 한 푼 보태주지 않는다. 나는 일용직 근로자나 다름없는 프리랜서다. 그런데 내 시간을 이렇게 뭉개버리니 이 일을 당장 관두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이 일 그만두면 또 어디서 생계비를 벌 수 있단 말인가? 출근 안 하고 집에서 키보드 두드리면서 급여 받을 데가 마땅치 않다. 오마이뉴스에도 원고를 보내봤는데, 거긴 건당 고료가 붕어빵 하나 겨우 사 먹을 수준이었다.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상사 험담을 하다가, "내가 이 더러운 직장 사표 안 내면 성을 간다"라고 호언장담하다가도 다음 날 아침이면 조상님께는 면목 없지만 회사로 발걸음을 질질 끌고 가는직장인처럼 말이다.아무튼 나는 업체 측 담당자의 터무니없는 행동에 또 화가 확 치밀어서 혼자 쌍소리를 해댔다.
나는 더 나은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박사 학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대학원에 입학했다. 하루는 의정부역에서 1호선을 타고 학교로 가던 중이었다.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고 있었다. 객차 안에서 발생한 응급 환자를 처치하느라 열차가 꽤 많이 지연되는 바람에 지각할 판이었다. 그날도 시트는 오지 않았다. 이미 오후 1시가 넘었다. 그런데열차가 방학역에 다다를 무렵 갑자기 카톡이 울렸다. 시트가 이제 왔으니 '가급적 빨리' 보내달라는 지시였다.
입에서 욕이 다시 절로 나왔다. 시트 작업을 하자고 지금 열차에서 내렸다간 지각이다. 그런데 비어 있는 임산부 배려석이 보였다. "옜다 모르겠다." 나는 임산부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노트북을 꺼내 작업을 시작했다. 나를 향할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은 애써 무시하고서.
나는 임산부 배려석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남자들을 향한 수위 높은 혐오 발언을 잘 안다. 그렇지만 그날은 정말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수업에도 지각하기 싫었고, 일도 해야 했다. 이해를 바란다. 그리고 세상에는 나 같은 불쌍한 남자가 또 있을지도 모른다. 만원 지하철에 혹여라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서 소심하게 노트북을 두들기는 사람을 발견하면 너그러이 봐주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물론 휴대전화로 야구 중계방송이나 보면서 다리까지 쩍 벌리고 가는 꼴불견이라면 봐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겠지만. 나는 약 10분간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마음으로 '업무'를 서둘러 마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