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백화점에서 부랴부랴 급하게 산 구두가 막상 신어 보니 생각보다 컸다. 뒤꿈치가 헐렁하다.바로 실전 투입인데 어쩔 수 없다. 그냥 신고 가는 수밖에. 내딛는 발걸음마다 신경이 쓰인다.
이 학교 교정을 15년 만에 밟는다. 그때는 노어(러시아어)과에 편입하려고 필기시험을 봤다. 그리고 면접 대상자가 되었다.어머니는 희소식이라며 꽤 기뻐하셨지만그리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면접 대기자 번호가 두 자리 숫자로 밀렸기 때문이다.
뒷자리 대기 번호를 받으면 무조건 떨어진다는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한국외대가 편입학 전형료를 최대한빨아먹으려고모집 정원의 4배만큼 면접에 올려놓고최종 합격자는 그냥 필기 성적순으로 끊는다는 소리였다. 그런 말이 왜 나왔느냐 하면, 필기시험에서 떨어져 면접까지 가지 못한 사람은 편입 전형료 일부를 환불받았다.학교는 대기자 번호가 필기시험 등수와 무관하게 부여된다며 소문을 일축했지만, 온라인 카페에서는 대기 번호가 밀리면 다른 학교 준비하라는 둥 가망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게 맞는 것 같다. 필기시험 등수가 모집 정원 밖으로 밀려난 사람이 붙으려면 안쪽에 있던 누군가가 물먹어야 한다. '전복'을 정당화할 만한 껀덕지가 면접 때 만들어질 수 있을까?그 자리에서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할 것도 아닌데 말이다. 2만 단어장을 외워야 합격한다는 편입 영어 필기시험을 만든 취지도 나중에 입시 비리니 뭐니 잡음 안 나오도록 공정한 정량평가를 하겠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공무원 면접도 마찬가지라는 소리를 나는 들은 적 있다.
'혹시 모르잖아. 나는 특별히 재수가 좋은 놈일지도.'
결말이 뻔한 희망 고문인데도 나는 희망을 품었다.
'러시아어를 배우고 싶다는 나의 간절한 마음이 기특해서 교수님이 날 붙여 주시지는 않을까? 내가 편입에만 성공한다면 말이야. 남가좌동에서 외대까지첫사랑그녀를 만나러가는 데만 한 시간 반 넘게 걸리는매일의장정을 안 해도 된다. 편입생이라는 꼬리표는 달리겠지만그녀와 같은 학교 교정에서 깨를 쏟는 대학 생활을 하게 되리라. 내가 러시아어로 넘어가니 우리 사이 전공은 달라지겠지만 그게 더 잘된 일이다.'
하지만 뒷번호 대기자를 맞이하는 교수는 '이제 더 볼 것도 없으니 일찍 퇴근이나 해야지' 하는 것 같았다. 정말 몇 마디 할 기회도 없었다.편의점 알바 면접이 이보다는 훨씬 더 길었을 것이다.
이 학교에서 두 번째 면접이다. 영영 이루지 못한 학부 편입학은 아니다. 이번에는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며 원서를 집어넣었다. 첫사랑 그녀와 헤어진 후 이문동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았는데, 도서관은 통유리 벽으로 리모델링되었고 땅 아래로도 주차장과 건조물이 생긴 걸 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싶었다. 아내는 날 응원해주겠다며 외대 교정까지 따라 나섰다.
대학원 진학은 내가 프리랜서로서 오래가기 위해 멀리 보고 장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중에 교수가 된다거나 연구소에 자리 하나 받을 거라는 뜬구름 잡는 기대로 벌인 일은 아니다.
업체와의 거래 관계는 곧 끊어질 것 같았다.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나서야 할 텐데, 그다음 먹거리로 출판 번역 시장을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학벌도 보잘것없고 이름 걸고 책 한 권 번역한 경험도 없는데, 출판사에 명함 내밀려면 박사 학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사실 한국외대와 서울시립대 둘을 놓고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처음에는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공립대라서 대학원 등록금이 외대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현실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서울시립대 대학원이 전일제라서 지원이 망설여졌다.
전일제 학생이란 별도의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고, 주 40시간 이상 교육과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학생을 말함. 전일제 학생은 4대 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가입여부로 확인함.
나는 업체와 고용 계약을 맺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다. 그래서 전일제 대학원 입학에 걸림돌이 될 건 없었다. 하지만 평일에는 매일 오전 9시까지 납품해야 하는 원고가 있고, 마감 기한이 촉박한 글을 쓰고 있던 터라 교수 연구실에 소속되어 잡무에 옭아매면 일과 학업의 양립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외대 터키중앙아시아몽골학과라는 단숨에 읊기 숨찰 정도로 긴 간판을 단 학과에 원서를 냈다.
면접은 방랑 생활로 점철된 나의 일생을 변호하는 자리였다. 자기소개서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10년짜리 공백이 두 개나 있다. 군 휴학 기간을 셈에서 빼 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명지대 아랍지역학과를 졸업하는 데 무려 십 년이 걸렸다. 게다가 평균평점도 보잘것없는 3점대 초반대. 아랍어 과목에서 죄다 C, D를 받았는데 복수전공이었던 사학과에서 A+ 아니면 A를 맞는 덕분에 2점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명지대를 자퇴하고 허송세월하다가 늦깎이로 모교에 재입학했는데, 전공인 아랍어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학부 졸업 후 대학원에서 터키 역사를 전공하겠다며 오스만제국사 관련 서적이라면 영어로 된 것이든 프랑스어로 된 것이든 닥치는 대로 읽는 '터키파(派)'가 되었다. 명지대 도서관이 소장한 오스만제국사 원서 대부분은 내가 구입을 신청한 것들이다.
방학 때마다 나는 터키로 나가서 퇴메르(TÖMER)에서 터키어를 배워오곤 했다. 당연히 아랍어 공부와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졌다. 게다가 터키어 어휘의 상당 부분이 아랍어나 페르시아어에서 파생했는데, 아랍어 회화 시간에 나는 입에서 터키어 단어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이집트인 원어민 교수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집트는 16세기 초에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놓이는데, 오늘날 이집트 사람들은 그 시절을 식민 지배의 굴레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사학과로 전과(轉科)하고 싶었지만 그 길이 막혀버려서 복수전공을 신청했다. 아랍지역학과에서 사학과를 복수 전공하려는 학생도 나밖에 없었다.
"나이도 많은 데 아랍어에나 집중해서 빨리 취업할 길을 찾아야지. 경영학과도 아니고 사학과?"
복수 전공 신청서를 제출하려면 학과 주임 교수 도장을 받아야 했는데, 교수님이 혀를 끌끌 차셨다.
나의 어지러운 행적을 이야기하는 데 30분으로도 모자랐다. 15년 전 편입 면접을 이렇게 길게 끌고 갈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학부를 졸업하고 오스만제국과 아체(Aceh)와의 교류사에 관심이 생겨서 인도네시아로 건너가서 1년간 인도네시아어를 배운 일이며, 해당 분야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이스마일 하크 카드 박사와 인연이 닿은 덕분에 터키로 넘어가서 퇴메르에서 최고 등급 C2 증명서를 따고 이스탄불 메데니예트 대학교에 석사 과정 등록했던 이야기며, 인도네시아에서 만났던 아내와 결혼하여 인도네시아에 정착해 살다가 하필이면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급하게 귀국했던 일이며 내 구구절절한 사연을 교수님께서 다 들어주셨다.
그러다가 말미에 생업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쓴 이름 없는 글을 게시하는 그 기관을 교수님도 알고 계셨다. 고료가 너무 짜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