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에게 연 소득 2,100만 원은 생각보다 높은 허들이다. 5월마다 종합소득세 신고를 하는 데 세법은 프리랜서를 인적용역 '사업자'로 본다. 다시 말해 나는 업체에 번역이라는 서비스(용역)를 제공하는 1인 자영업자인 셈이다.
업체 측은 원천징수 의무가 있다며, 나한테 지급하기로 했던 원고료에서 3.3%를 떼어간다. 5월마다 종합소득세 신고와 지방소득세 신고를 하면 얼마 후 떼인 만큼을 나라에서 돌려준다. 이게 프리랜서에게는 보너스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나중에 아내가 비자를 만들 때 내 사업소득이 걸림돌이 될 줄은 난몰랐다.
코로나 팬데믹이 터지면서 우리는 짐을 싸서 도망치듯 인도네시아를 빠져나왔다. 나는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사실을 이코노미스트 지면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 같아 보였다. 기자는 사스라는 호흡기 감염증 유행 사태를 이미 겪어 본 중국 당국이 우한에서 시작된 미지의 바이러스를 이번에는 잘 통제할 것이라며 애써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곧 한국이 코로나로 발칵 뒤집혔고, 남쪽 바다 저 멀리 인도네시아에 첫 확진자가 보고되는 데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내가 업체에 매일 써서 보내는 원고는 동남아시아의 이런저런 나라에서 코로나 사망자가 전날에 몇 명이나 늘어났고, 봉쇄 조치로 이런저런 나라를 오가는 항공편이 끊겼다는 이야기들로 도배되었다. 이게 남 이야기가 아니다.내가 여기서 꼼짝달싹 못 하게 될 판이었다.
우한에서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유튜브 동영상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한국에 있으면 그나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코로나에걸리더라도한국에서는 제때 치료 받을 환경이 되지 않는가. 의료 역량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여기서는 까딱 잘못하면 "내 나이 서른아홉 수를 넘기지 못하고 불의타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겠구나!"잔뜩겁이 났다.
게다가 엄청난 병원비로 두들겨 맞을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병원비 말이 나와서인데, 평소 병원 갈 일이 잦다면 동남아시아 이민을 생활 물가 싼 것만 믿고저지르지 마시라.
일전에 뭘 잘못 먹어서 장이 배배 꼬였는지 배가 아프고 열이 나고 설사를 계속했다. 아픈 몸 끌고 동네 병원에 갔지만 전문의 만나는 데 몇 시간 줄 서서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사실 전문의가 근무하는 병원이 집 근처에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 곳이 이곳이다.피검사 받는 데 10만 원 이상을 지불하고, 또 검사 결과 설명 들으러 진찰실 앞에서 또 기다렸다. 다음날 또 피검사 받고, 선생님 만나는 데 2~3만 원 들고. 이걸 며칠 동안 반복하니 병원비 50만 원이 우습게 들어갔다. 한국에서라면 금방 진료받고 단돈 몇만 원이면 끝났을 일을 여기서는 크게 치렀다. 더군다나 음압 병실에 장기 입원해야 하는 코로나라면? 병원비가 몇천만 원이 나올지도 모른다.
사원에서는 예배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가 멈추지 않았으나, 나는 금요 회중 예배 참석을 중단했다. 우리 부부는 식자재와 음식을 모두 고젝(Gojek) 배달앱으로 주문했고, 배달 기사가 가져온 비닐봉지에는 손 세정제를 마구 뿌려댔다. 화학 약품도 유해하다는 상식은 당면한 위협 앞에 무너진다.
두문불출(杜門不出). 자발적인 감옥살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택연금인 셈이다. 우리 부부의 놀이터나 다름없는 립뽀 카라와치 수퍼몰의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노트북 옆에 두고 원고를 작성할 수도 없게 됐고, 동네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서 솔라리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나시고렝 짜베 이조(매운 고추를 넣어 만든 오리볶음밥)를 먹을 수도 없게 되었다. 삶의 질이 뚝 떨어져 버렸다.
도대체 이 생활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 걸까?이러다간 있던 병은 도지고, 없던 정신병까지 생길 판이다. 몇 년씩이나 좁은 방구석에 콕 처박혀 지낸다는 히키코모리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출구는 있었다. 매년 대한민국 정부가 나랏돈을 들여 외국인 장학생을 선발하는 GKS 프로그램에 아내가 합격했다. 경쟁이 치열했기에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자고 했었는데, 큰 기대를 걸어야 할 상황이었고 간절한 기도는 응답받았다. 아내가 학생비자를 신청해야 했기에 우리는 서류에 아포스티유를 발급받으러 자카르타 중심가에 있는 외교부 청사로 택시를 불러서 갔다. 그게 몇 달 만의 첫 바깥세상 구경이었다.
세 들어 살고 있던 집의 계약기간도 끝나가던 참이라 떠날 타이밍도 딱 맞았다. 인도네시아는 전세가 없고 월세도 다달이 내는 게 아니라 한목에 선불한다. 계약기간이 2년이라면 24개월 치 월세를 한꺼번에 낸다. 이건 세입자 입장에서 매우 불리한데, 나중에 집에 하자가 발견되어 집주인과 다툼이 발생했을 때 배 째라 하면 해결이 쉽지 않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집이 배관 공사가 엉망이라 설거지할 때마다 싱크대 오수가 바닥으로 줄줄 흐르질 않나 하여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다행히도 보증금이 푼돈이어서 못 돌려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우리는 월세 한 달분만 보증금으로 걸었다. 그리고 보증금을 돌려받을 생각 안 하는 게 속 편하다. 아내 말로는 에어컨이 고장 났다고 집주인이 박박 우기면서, 보증금을 원상복구 비용으로 퉁치겠다고 떼를 썼다고 한다.
사실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자, 집주인은 그 집을 우리에게 팔 테니 "이참에 내 집 마련하는 게 어떻겠느냐"며 계속 졸라대어 귀찮게 굴었었다. 20평쯤 되는 복층 집이었는데, 10억 루피아, 당시 환율로 우리 돈 8천만 원에 내놓겠다고 했다. 나는 월세가 우리 돈으로 1년에 300만 원밖에 안 하는 이 복층 집에 혹해서 계약했는데, 살아갈수록 몰랐던 하자가 새로운 얼굴을 내미는 통에 골치가 아팠다. 집주인은 세상 물정 잘 모르고 어리숙하게 보이는 우리에게 이 골칫덩이를 넘겨버리고 두 손을 탁탁 털겠다는 검은 속셈을 품은 게 분명했다. 그런 집이 팔릴 리가 없다. 이 찰거머리 같은 아줌마는 우리 부부가 한국에 정착하고 나서 1년이 넘도록 계속 그 집 사라고 보채는 문자 메시지를 아내에게 라인(Line)으로 보냈다고 한다. 우리가 그렇게 호구인 줄 아나.
아내가 춘천에서 대학원 다니는 동안은 내가 아내의 체류 자격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 이후가 문제였다. 대한민국 국민의 외국인 배우자는 누구나 결혼이민비자(F-6)를 취득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그중 나를 가장 괴롭히고 자존감을 바닥으로 처박은 조건이 바로 재정 능력 입증이었다.
외국인 배우자의 결혼이민비자 신청 시 한국인 배우자의 소득이 법정(法定)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데, 이 기준선은 물가상승분에 연동되어 매년 오른다. 하지만 나 같은 프리랜서들이 받는 글 값은 요지부동이다. 게다가 이게 사업소득이라서 국세청에서 소득금액증명원을 떼어보면 온전한 소득으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2천만 원 벌어도 실제로 서류상 소득금액으로 잡히는 건 700만 원도 안 된다. 그러니 나는 아내에게 비자 하나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경제적 무능력자가 되었다.
재정 능력 입증 요건을 면제받을 몇 가지 예외 사항이 있긴 하다. 결혼이민비자를 신청하기 직전 1년간 부부가 국외에 거주한 사실이 있다면, 소득 요건이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이 소중한 기회를 알면서도 날려버렸다. 아내의 체류자격이 '학생'에서 '국민의 배우자'로 바뀌면 당장 GKS 장학금과 생활지원금 지급이 중단된다. 대학원 등록금을 자비로 내야 한다.
나는 아내 비자 문제로 전문가의 도움을 좀 받아보려고 출입국관리사무소 근처에 행정사를 찾아갔는데, 행정사는 다른 바쁜 일이 있는지 한참 통화를 길게 하느라 우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돈도 안 되는 귀찮은 손님 찾아왔다는 듯 꽤 퉁명스러운 말투로 아주 거슬리게 투덜거렸다.
"신문 기사, 그거 번역해서 돈 몇 푼이나 번다고. 딱 봐도 소득 얼마 되지도 않겠구먼. 그러지 말고 둘이 그냥 애를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비자 그냥 나와요."
아, 양반이 자기가 뭐 그리 잘났다고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우린 그런 걸 해결책이랍시고 들으려고 여길 찾아온 게 아니다. 그리고 애가 무슨 애완견이야?
사실 행정사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난 알고 있었다. 그 방법을 최후의 방편으로만 남겨두고, 정말 거기까지는 안 가고 해결하려고 발버둥을 치다 보니 행정사를 찾아갔던 것이지.
본인의 소득만으로는 법정 기준을 충족할 수 없다면 직계가족의 소득이나 재산으로 이를 보충할 수 있다. 그러려면 우선 우리 부부가 수원 본가(本家)로 주소를 옮겨서 합가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부모님 보유 부동산 재산 평가액의 5%만큼을 내 소득으로 갈음할 수 있다. 공직 퇴직 후 이십여 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법무사 사무실을 운영해 오신 아버지께서 직접 나서 등기부등본과 공시가격표를첨부하여 나의 빈약한 서류를 꼼꼼하게 보강해 주셨다. 몇 개월을 더 기다린 끝에 아내가 결혼이민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는 그 비자 덕분에 원격대학에서 원어민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