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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PSAT형 인간이 아니었다

7급 오징어 게임

by 이준영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감독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험자들이 시험지를 넘기는 소리가 교실을 채운다. 또각또각 펜촉이 딱딱한 책상 표면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숨 막히는 분위기에 나는 압도당한다. 이런 공기는 수능 이후 처음이다. 외대 편입 시험 때도 느껴보지 못했다. 마른기침조차도 부담스럽다. 나는 목구멍이 가려웠지만 큰 민폐가 될 것 같아서 침만 계속 꿀꺽 삼키면서 기침을 애써 참는다.


남녀 감독관 두 사람이 앞줄에서부터 조심스럽게 수험자의 수험표와 신분증을 확인하고 OMR 카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수험자들은 이런 평범한 절차도 문제 푸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들 수험표와 신분증을 투명 파일에 넣어 한 벌로 잘 정리하여 책상 옆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놨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둔 스톱워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양면 접착테이프로 딱 고정해 놓았다. 이색풍경이다. 학원에서 강사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모양이다. 단 1분의 낭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준비 태세다. 나만 스톱워치가 없다. 토익 시험 칠 때처럼 손목시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내 개인화기는 연필 한 자루, 컴퓨터 사인펜 두 자루가 전부다. 이 전장(戰場)에는 나만 모르는 야전 교리가 너무나도 많다.




나는 외무영사직 공무원 시험에 출사표를 던졌다. 외무영사직은 검찰직, 감사직과 함께 7급 공무원 시험에서 경쟁률이 가장 높은 '삼대장'으로 꼽히는 직렬이지만, 전공 평가 과목에 국제법, 국제정치학, 제2외국어가 있기에 나에게 유리한 직렬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어 기출 문제를 풀어봤는데, 만점 아니면 하나 틀릴 정도로 문제가 쉬웠다. 국제정치학은 역사(외교사)를 품은 과목인데, 나는 국제정치 이론서를 많이 읽어왔기에 이 과목에 큰 자신감이 있었다. 국제 정세에 관심이 많아서 국제법 과목도 그리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학원에 돈 싸갖다 바칠 생각이 없었다. 정인섭 교수가 쓴 <신국제법강의>와 7급 공무원 수험생 카페에서 일타 강사로 소문이 자자한 황남기의 헌법 교재를 구입해서 혼자 학습했다. 그런데 공무원 시험은 전공 과목만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공직적격성평가, 수험생들이 피셋(PSAT)이라고 부르는 1차 관문이 있다. 7급 이상 국가직 공무원으로 입직하려면 본인이 지원한 직렬에 상관없이 누구나 이 관문부터 먼저 뚫어야 한다. 과거에는 전 직렬 공통과목으로 오전에 국어, 한국사, 영어 문제를 풀고, 점심 도시락 먹고 오후에 전공과목 네 과목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이 공통과목이 한국사는 한국사검정능력시험으로, 영어는 토익으로 대체되었다. 그래서 7급 국가직 공무원 시험의 진입 장벽이 부쩍 낮아진 셈이다. 특히 세세한 맞춤법부터 문법까지 외울 게 많아서 수험자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국어 과목이 PSAT으로 바뀌었는데, 이 PSAT에서 모집 정원의 대략 7배수에 달하는 수험자를 솎아낸 뒤 두세 달 후에 있을 2차 전공평가 시험장에 앉혀 놓는다. 셈을 한번 해보자. 외무영사직의 경쟁률이 100:1을 넘어가니까 이 교실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서 이번 게임에서 살아남아 다음 판으로 올라갈 사람은 많아야 한두 명? 어쩌면 이 교실에는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을 수 있다.


수험자들은 1교시에 언어논리와 상황판단이라는 두 개의 과목을 120분 동안 한꺼번에 치른다. 그리고 짧은 휴식 시간을 보낸 후, 표와 그래프를 읽으면서 백만 이상 단위의 엄청나게 큰 수들이 무수하게 쏟아지는 복잡한 사칙연산 문제를 60분 동안 정신없이 풀어 재껴야 하는 자료해석을 2교시에 치른다. PSAT은 수능 언어영역과 수리영역과는 다르게 지식을 묻지 않는다. 주어진 지문 안에 답이 있고, 반드시 지문에 근거하여 답을 찾아야 한다. 언어논리에는 역사, 과학, 사회 분야 비문학 지문이 주를 이루는 데, 예컨대 나 같은 역사학 전공자가 역사 지문을 만나면 지문 읽기가 한결 편하기야 하겠지만 역사 지식이 답을 찾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막말로 지문에 올리버 크롬웰이 찰스 1세가 아닌, 그의 아들 찰스 2세의 목을 땄다고 적어놨더라도 시험을 치다 말고 혼자 화를 분출해서는 안 된다. 이 시험에서는 지문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그리고 수(數)를 다루는 자료해석 과목도 마찬가지다. 수험자들이 근의 공식 따위를 모른다고 해서 문제를 못 푸는 게 아니다. 요령만 있으면 암기에 큰 시간을 쏟지 않아도 수험자들이 PSAT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직을 호시탐탐 노리는 직장인들이 전공과목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도 간이나 좀 보자며 PSAT에 응시한다. 그런 사람 중에서 고득점을 받아 1차 관문을 쉽게 통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부러움과 질시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며 'PSAT형 인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PSAT은 애초에 시간이 부족하도록 설계된 시험이다. 문제 풀이에 숙달되지 않으면 시간 부족으로 종 칠 때 뒤에 남은 문제를 죄다 찍고 나오기 마련이다. 나는 토익 RC 때도 시간이 부족해서 문제를 찍고 나온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건 한국말로 치는 시험인데도 집에서 초시계로 시간 재고 풀어보면 늘 문제를 남겼다. 남들은 노량진 고시학원에 가서 모의고사도 쳐보고, 부산 사람이 KTX 타고 서울까지 올라와서 실전에서 쓰는 것과 똑같이 생긴 OMR 카드와 시험지로 '훈련도 실전처럼' 치르는 모의고사에 응시한다는 데, 나는 오늘 안경을 쓰고 긴 치마를 입은 여성 감독관으로부터 실전용 OMR 카드를 처음 받았다.




감독관이 내가 앉은 줄로 다가왔다. 코로나 시국이라 감독관이나 수험자나 모두 마스크를 썼기에 얼굴만 보고 나이를 가늠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로 짐작하건대 감독관은 서른 중후반대 여성 같다. 다른 수험자들은 수험표와 신분증을 투명 파일 안에 넣어 책상 옆에 보기 좋게 붙여놨기에 수험자 확인 절차가 수월하게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준비를 안 했기에 문제 풀다 말고 OMR 카드를 들어 그 밑에 깔린 수험표를 보여주고 하다가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컴퓨터용 사인펜을 바닥으로 떨궜다. 감독관이 그걸 주워주려고 한 것 같은데 나도 그걸 빨리 주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다 네임펜을 감독관의 손과 내 손의 동선이 엉켜버리고 말았다. 펜촉이 내 손등을 쓱 긁고 지나갔다. 비스듬한 검은 줄이 손등에서 손목까지 제법 기다랗게 그어져 있었다.


감독관의 낯빛은 하얀 마스크에 가려졌어도, 불의의 작은 사고에 흔들리는 눈빛까지는 다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역시 프로는 프로였다. 잉크가 OMR 카드 답안에 묻은 것도 아닌데, 수험자가 시험을 그르칠 만큼 큰 사고는 아니다. 몸에 잉크가 묻으면 그날 시험을 망치는 유별난 징크스가 있다고 칭얼대는 수험자가 있다면 모를까. 그냥 손등에 '검인' 싸인 하나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감독관은 그 펜으로 내 답안지에 서명을 마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음 수험자 쪽으로 넘어갔다. 미안하다는 짧은 사과의 말도 없었다.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게 차라리 수험자를 돕는 일이니까. 수험자에겐 일분일초가 아쉬운데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말이다.


언어논리 문제를 푸는 동안에는 손등에 생긴 유성펜 자국이 의식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판단 영역에서 복잡한 논리퀴즈 문제의 진창에 빠졌고, 그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제가 잘 안 풀리니까 짜증이 나고, 시선이 한번, 두 번 그리로 자꾸 향한다. 안 풀리는 문제 놔두고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풀릴 듯 안 풀린다. 또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역시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대여섯 문제를 그렇게 넘기고 나니, "역시 나는 PSAT형 인간은 아니었구나"라는 상황판단이 제대로 선다. 20분도 안 남았는데 그냥 넘긴 문제까지 다 합하면 못 푼 문제가 절반을 훨씬 넘는다.


그러자 조금씩 바람이 빠지고 있던 긴장의 풍선이 순식간에 터졌고, 집중력은 산산조각이 났다. 손등에 묻은 펜 자국이 눈에 되게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걸 뚫어져라 쳐다본다. 엄지손가락을 자국에 대고 슬쩍 문질러본다. 그걸 지워내야 숨은 답이 보일 것만 같다. 안 지워진다. 몇 번 더 세게 문질러본다. 소용없다. 흡착력 강해 보이는 유성잉크가 손등에 묻은 지 한참 시간이 지났기에, 피부 조직 위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비켜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10분이 더 남았지만, 나는 OMR 카드 답안의 빈칸에 한 번호로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문제를 다 푼 사람처럼 깍지를 끼고 손등에 펜 자국을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세포 마디마디를 검게 물들인 잉크가 점령군처럼 영역을 장악한 게 보인다. 종이 울렸다. 아까 그 여성 감독관이 내 책상 위 OMR 카드를 걷어갔다. 답안을 다 걷고 나서 나와 잠깐 눈이 마주쳤으나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대로 교실 문을 열고 나가는 프로 정신을 끝까지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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