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수업 첫날, 나는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문이 반쯤 열린 강의실 앞에 서서 잠깐 숨을 한 번 가다듬는다. 십 년 전, 모교(母校)로 뒤늦게 재입학할 때 느꼈던 기분이 되살아난다.
화석(化石)으로 남아있어야 할 법한 01학번 아저씨가 띠동갑 내기 어린 학생들과 한 공간에서 수업을 듣게 되어 무척 민망했다.나는아랍어 작문 강의를 수강 신청했는데, 현장에서 의료통역사로 일하는03학번 여자 후배가 그 과목의 강사로 들어왔다. 후배는 한 사람씩 출석을 부르다가 내 이름 석 자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수강생으로 강의실 안에 앉은 내 이름을 부르고 나서 곧바로 '선배님'이라는 존칭을 뒤에 붙였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까지 했다. 육사 선배 기수 부연대장을 휘하에 둔 후배 연대장이 느낄 지휘 부담이 그때 후배가 강의를 진행할때 느꼈을 부담과 비슷할까? 못난 선배는 제때 졸업을 하지 못해서 후배에게 민폐를 끼쳤다.
그래도 대학원 수업에서는 나이와 전직(前職)을 접어두고, 상대방을 '선생님'으로 존칭하는 관계를 맺다 보니 세대 차이에서 오는 위화감이 적어서 다행이었다. 교수님 나이뻘이 되는 마흔 갓 넘은 아저씨는 파릇파릇한 청춘들과 학구열을 불태우게 되었다. 나를 맞이하는 얼굴들에 아직 낯가림 잔뜩 낀 수줍은 눈인사를 건네고, 늘 그래왔듯이 앞자리에서 두 번째 줄 오른편 빈 의자에 가방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나는 4년 만에 정규 과정 수업으로 돌아왔다. 내가 이십 년 동안 겪은 학교 편력은 한국외대 일반대학원에서 터키학으로 끝장을 볼 모양이다. 이제 그래야만 한다. 책 열 권으로 써도 종이가 모자랄 것 같은 나의 떠돌이 생활은 섭렵(涉獵)이라 하기에는 지나친 자기 미화요 합리화다. 나는 2001년도 대학입시에서 명지대학교 인문계열에 특차 전형으로 들어가 놓고 졸업하는 데 무려 14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학적 수집이 취미인 것처럼 편입학으로 적(籍)을 두고 졸업하지 않은 학사과정을 두 개나 남겼다. 대학원도 그렇다. 이번이 세 번째 대학원 진학이다.
첫 대학원은 내가 아무리 말해봐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그리고 앞으로도 모를, 이스탄불 메데니예트 대학교(Istanbul Medeniyet University)였다. 이스탄불의 아시아 쪽 항구 카드쾨이(Kadıköy)에서 교통체증으로 항상 몸살을 앓는 D100번 도로를 타고 사비하 괵첸 공항 가는 방향으로 쭉 달리다 보면 O-1 도로와 교차하는 나들목이 나오는데, 거길 지나 조금 더 가면 사람이 길을 건널 유일한 통행로인 육교가 보인다. 승용차든 대형트럭이든 차가 쌩쌩 달리는 길가에 바짝 붙은 길쭉한 부지에 학교 건물이 몇 동이 서 있는데, 그곳이 내가 터키에서 다녔던 학교다. 구글 스트리트뷰로 다시 봐도 그때랑 지금이랑 달라진 게 없다. 한국외대 서울캠퍼스만큼이나 교정이 좁지만, 공과대학과 의과대학 강의동이 있는 길 건너편 부지까지 더하면 외대 서울 캠퍼스보다는 조금 더 넓다.
메데니예트 대학교는 2010년에 개교한 신생 학교인데 교명에 TC ('튀르키예공화국'이라는 터키어 두문자어)가 붙은 공립학교다. 그래서 1년 등록금으로 우리 돈 30만 원밖에 안 낸 걸로 기억한다. 터키에서 사립학교는 학부모들의 학비 부담이 우리나라 대학 등록금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만만치 않고, 빌켄트(Bilkent) 같이 비싼 곳은 로스쿨 등록금을 뺨친다. 그래서 공부 좀 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운 터키인 학생들은 대개 공립학교로 진학한다. 아프리카나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터키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선발된 학생들도 공립학교에 많이 모이는데, 나는 학교와 기숙사에서 그쪽 나라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나의 룸메이트는 마르마르 대학교 법학과 학생이자 투르크메니스탄 출신 아자트(Azat)였는데, 옷장이 법학 서적으로 가득 차서 옷이 들어갈 공간이 없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던 친구였다. 사진으로 본 아자트의 어머니 역시 법률가였고, 구소련 국가의 군복 같아 보이는 정복을 입고 있었다. 아자트는 드디어 박사 논문 심사를 통과했다는 근황을 페이스북 담벼락에 남겼다.
말 나온 김에, 메데니예트 대학교 구내식당 이야기는 꼭 하고 넘어가야겠다. 외대 학생식당에서 '천원의 아침밥'을 볼 때마다 나는 그곳이 가끔 그리워진다. 아침과 저녁 식사는 없고 점심 식사만 나오는데, 학생들은 2리라, 당시 환율로 우리 돈 500원만 내면, 고기 요리와 초르바(터키식 수프)를 먹었다. 게다가 신선한 채소 샐러드를 먹고 싶은 만큼 접시에 수북이 담아서 올리브유에 드레싱까지 해서 가져올 수 있었다. 이태원 터키 식당에서 이렇게 먹으려면 1만 원으로 어림도 없다. 교수 식당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교수들은 학생들과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5리라를 내야 했는데, 그 가격도 학교 담장 밖 외식 물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었다. 5리라로는 자꾸 먹으면 건강에 좋을 리 없는 되네르 케밥이나 겨우 밖에서 사 먹을 수 있었다.
터키의 대학교는 학생증이나 교직원 신분증이 없으면 출입문을 아무나 통과할 수 없다. 그래서 외부인이 대학 교정을 구경하기 힘들고, 동네 주민이 한 끼니를 값싸게 때우려고 구내식당에 드나들지도 못한다. 사실 구내식당으로서는 밥을 이 가격에 팔면 적자가 불 보듯 뻔하니, 교육부에서 예산 지원이 나오는 게 틀림없다. 그런데 내가 터키를 떠나고 나서 5년간 리라(TL) 가치가 무려 십 분의 일 수준으로 녹아내렸으니, 지금은 학생들이 뒤에 0이 하나 더 붙는 지폐 한 장을 꺼내야 점심밥을 겨우 챙겨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밥값 오름세가 그 정도 선에서 끝난다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터키 경제가 고물가에 너무 많이 망가져 버렸다. 터키에서는 하루 끼니를 두 끼로 줄여서 허리띠를 '물리적으로' 졸라매야 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다.
당시 내가 번역일을 해서 받는 원고료와 어머니가 매달 부쳐주시는 용돈만으로 터키에서 생활은 여유로웠다. 터키에서는 2016년 7월,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 정치적 혼란이 해소되지 않으면서 리라화 가치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으나, 외화 소득원이 있는 사람은 전반적인 물가 수준이 오히려 내려간 것처럼 느꼈다. 평소에 엄두가 나지 않았던 보스포루스 해협 바다 조망 고급 호텔에서 하룻밤 묵어볼 만도 했다. 기숙사에서 나오는 저녁밥이 지겨우면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배를 채워 오기도 했다. 하지만 아프리카 국가에서 온 기숙사 동료들은 학생 신분으로 이민법에 저촉되는 행위임을 알면서도 주말마다 땡볕에서 몸 쓰는 일을 해서 생활비에 보태 쓰곤 했는데, 그렇게 고생하고 받는 돈이 1,000리라(당시 환율로 우리 돈 30만 원)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가만히 앉아 키보드 좀 두들겨서 한 달에 1,500달러쯤 번다고 하니까 날 보는 눈들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디지털노마드 생활에 환상을 잔뜩 품었던 것 같다. 삼성이며 엘지며 대기업에 입사한 한두 학번 아래 후배들은 해외 지사에 나가서 승승장구하고, 띠동갑 후배는 졸업과 동시에 석유공사에 들어가서 캠퍼스에 현수막이 붙었다. 그런데 나는 나이 서른 중반이 되어서 정규직 취업은 물 건너갔고 푼돈 받으며 불안정한 번역 일감에만 매달려 있으니 위기의식을 느껴야 했다. 게다가 터키 사람들조차도 잘 모르는 신생 학교인 메데니예트 대학교에서도 신생 프로그램 '국제오스만학' 석사 과정에 입학했던 나는 느슨한 생활에 마취되어 현실이 짓누르는 거센 압박을 느끼지 못했다. 결혼이 그 마취를 풀 각성제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