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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Nov 30. 2024

두 번의 결혼식과 고난의 신혼여행

디지털 노마드

우리는 해를 훌쩍 넘겨 밀려버린 신혼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신혼여행이 밀린 데에는 피치 못할 여러 사정이 있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정말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예식 비용을 최대한 아끼려고 했기에 웨닝플래너 없이 혼사를 진행했다. 우선 자카르타 교외의 어느 작은 호텔의 연회장을 빌리기로 했다. 수카르노-핫타 국제공항과 가깝고, 처가와도 멀지 않아서 안성맞춤이었다. 부모님은 한국에서 8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셔야 했는데, 시차 적응도 되기 전에 다음 날 곧바로 예식을 올려야 하는 숨 가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여의도에서 일하느라 긴 휴가를 낼 수 없었던 동생도 나는 배려해야 했다. 부모님은 해외 여행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개별 여행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라이온스클럽 활동을 하면서 일본과 대만은 몇 차례 부부 동반으로 다녀오실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단체로 나갔던 거라서 언어 장벽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래서 동생이 부모님을 모시고 와야 했다. 간신히 1박 2일 휴가를 쓸 수 있었는데, 사실 와 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공항과 가까우면서도 예식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곳을 잡으려 했다.


호텔 주변은 황량해서 볼 거라곤 정말 하나도 없었다. 주위 민가들은 벽이 갈라지고 페인트가 벗겨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운동장은 비가 와도 배수되지 않은 물웅덩이로 가득했다. 새마을운동 시대를 사셨던 58년 개띠 어머니께서도 "나는 이런 집에서는 한 번도 안 살아봤다. 대구는 둘째치고 예천 시골집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라며 못 볼 걸 봤다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어머니는 큰집 동서들이랑 캄보디아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우리 옛날에 다들 힘들게 살았는데 뭐 하려고 남의 나라 가서 가난을 구경하냐"라면서 찢어지게 가난한 현지인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게 하나도 신기하지 않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를 자카르타 중심가로 모셔 왔다면 서울 느낌도 나고 볼거리도 많았을 텐데. 하지만 자카르타는 교통 체증이 심해 네댓 시간은 차에서 갇혀 있어야 할 판이었다. 무엇보다도 예식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예식장에 돈 수천만 원 갖다 바쳐 봐야 하루 잔치 끝나면 다들 잊어버린다.




행정적인 절차도 번거로웠다. 내가 미혼(未婚)이라는 증빙 서류를 떼서 종교부 사무소(KAU, Kantor Urusan Agama)에 제출해야 했다. 한국 대사관에 가서 혼인관계증명서를 한 통을 발부받고, 그걸 인도네시아어로 내가 직접 번역한 뒤 영사 공증 도장을 받았다. 장인어른께서 서류를 들고 종교부 사무소에 찾아가셨고, 우리 결혼식 날 종교부 공무원이 직접 나올 수 있도록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종교부 사무소에 불려 갔다. 혼인의 진위를 확인받고, 새신랑 새신부가 새 가정을 꾸리는 데 있어서 알아둬야 할 윤리 교육을 받았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가정불화가 생기면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할 것인가?' '가정 폭력이란 무엇인가?' 등등. 우리는 그날 다른 두 쌍의 예비부부들과 함께 3시간 동안 수업을 들었는데, 요즘 인도네시아에서 이혼하는 부부가 늘어나고 가정 폭력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국가가 나서서 예비부부들에게 이렇게 교육까지 하더라.


게다가 아내는 결혼식을 준비하는 중에도 학사 논문 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학사 논문이 사라진 지 오래라서 나도 그걸 써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는 대학 졸업을 위해 반드시 학사 논문을 작성해야 한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학사 논문 쓰는 걸 도와주겠다는 광고 전단이 전봇대에 붙어있다. 분명히 학사 논문을 대필해 주는 글 장사꾼도 있을 터이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인도네시아 대학교(Universitas Indonesia) 한국학과를 장학금까지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 덕분에 '쿰 라우데(cum laude)'가 찍힌 졸업장을 받고 학사모를 쓰게 된 아내는 아나톨리 김이라는 고려인 작가의 『다람쥐』라는 작품에 투영된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주제로 논문을 완성하느라 밤낮없이 고군분투했다. 깐깐한 지도교수에게 매일 불려 다녔다. 그 와중에 청첩장을 돌리고, 결혼식 날 입을 예복을 짓기 위해 따나 아방(Tanah Abang) 시장을 장모님과 오가며 원단을 구했다. 마치 동대문 시장을 연상시키는 도떼기시장처럼 사람들로 북적였고, 순다어로 떠들어대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하루는 하객들에게 줄 작은 선물을 준비하러 자티 느가라(Jati Negara) 시장으로 나도 따라나섰다. 


결혼식이 끝나고 일주일 후 우리는 처가 할머니의 고집 때문에 피로연을 또 베풀어야 했다. 호텔에서 열린 결혼식 때는 비용 문제로 하객을 많이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화교(華僑)처럼 턱시도를 입었다. 나까지 바띡을 입으면, 부모님께서 정서적 거리감을 너무 크게 느끼실 것 같았다. 이번에는 완전히 인도네시아식이다. 처가 앞에 텐트를 쳐놓고 풍악을 울리면서 마을 주민들에게 잔치 음식을 제공했다. 우리는 순다 전통 예복을 입고 무대 위에 올라 하객들이 원하는 만큼 몇 번이고 계속해서 사진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결혼식을 두 번 올리는 꼴인데, 아내 역시도 무척 피곤해하였고 일이 끝난 후 모든 걸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함께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다. 그리고 다음 이벤트는 아내 졸업식.




신혼여행을 어디로 갈지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서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발리가 '국내'에 있는데 우리가 굳이 해외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비행기를 뭘 타고 갈지 조금 고민하다가 가루다 인도네시아가 운영하는 저가 항공사인 시티링크(Citilink)에서 국내선 항공권을 예매했다. 발리를 놔두고 신혼여행지로 굳이 다른 곳을 고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고생을 하기로 했다. 신혼여행은 보통 부부로 첫걸음을 내딛는 한 쌍이 달콤한 추억을 쌓는 시간으로 여겨지지만, 우리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쩌면 여행이란 본디 고난과 동행하는 활동일지도 모른다. 여행이란 말을 뜯어보자. 여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트레블(travel)'이 도버 해협을 넘어가면, 어원이 같지만 '일'이라는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 단어 '트라바이유(travail)'를 만난다. 이 단어는 라틴어 단어 '트리팔리움(tripalium)'에서 나왔는데, 사람을 말뚝 세 개에 매달아 고문하는 도구라는 무시무시한 뜻을 지녔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똑똑한 로마인들이 모를 리 없었던 모양이다. 로마인들이 이미 간파한 진리를 우리도 체험하기로 했다. 여행의 고난 속에서 부부로서의 합을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말을 무턱대고 예비 신부 앞에서 늘어놓는 간 큰 남자는 나 말고 없기를 바란다. 그래도 손뼉이 맞아 소리가 났다.


우리는 응우라라이 공항에 곧장 내리지 않고, 발리 가는 방향에 있는 동부 자와의 말랑(Malang)이라는 도시에서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내려서 며칠 시간을 보낸 후 열차를 타고 동부 자와에서 가장 큰 도시 수라바야(Surabaya)로 이동했다. 곧바로 다음 열차로 갈아타야 했기에 우리는 도시를 구경할 짬도 못 내고 짐 가방을 들고 뛰어야 했다. 역에서 미고렝(볶음면)이나 박소(미트볼)로 간단하게 저녁을 때울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객차에 올라서 보니 말랑에서 탔던 특등석보다 좁고 등받이가 불편한 일반실이었다. 도시락 판매원이 복도를 지나다니길래 주린 배라도 달래려고 닭고기 나시고렝(인도네시아식 볶음밥) 도시락을 집어 들었건만, 조리한 지 한참 지났는지 닭고기는 육질이 푸석하고 돌덩이를 씹는 것 같았다. 기차간에서 먹는 도시락은 엔간하면 다 맛있는데 이날은 영 아니었다.


열차는 자와섬 끄트머리에서 발리를 마주 보는 바뉴왕이(Banyuwangi)를 종착역으로 여섯 시간을 달린다. 나는 총각 때 이 열차를 한번 타 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찌레본(Cirebon)에서 수라바야까지 자와의 무슬림 성자들의 발자국을 따르는 순례 여행 중이었다. 날이 밝을 때 이 기차를 타면 경치가 장관이다. 열차는 해안을 끼고 달리는데, 철길이 모래사장과 어찌나 가깝던지 높은 파도라도 치면 선로가 바닷물에 잠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곳에 민가들이 있었다. 그 마을은 필시 물난리를 골백번은 더 당했을 거다.




나는 어두컴컴한 창밖을 응시하다가 노트북을 테더링으로 인터넷에 연결하고 로이터 통신 보도문을 읽었다. 신혼여행 내내 나는 평소보다 더 많은 글을 썼다. 글에 이름 석 자를 끝내 넣지 못한 나는 돈만 바라보기로 했다. 이름 없는 글을 쓰는 데서 오는 공허함은 소득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로 덮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원래 내가 맡은 권역은 동남아시아였으나, 영역이 아닌 인도-남아시아, 중동부유럽, 심지어는 중남미에도 팔을 뻗었다. 나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를 수년간 거르지 않고 읽어왔고, 포린어페어(Foreign Affairs)도 구독한 덕분에 국제 정세에 빠삭하다고 늘 자부했다. 게다가 프랑스 신문 르 몽드(Le Monde)도 술술 읽었기에 영어권 매체만으로는 알기 힘든 아프리카 소식도 남들보다 더 깊이 전달할 수 있었다.


작성자들이 공유하는 구글 시트에 글감의 개요를 정리해서 남들보다 먼저 올려놓으면 남의 일을 빼앗아 올 수 있었다. 먼저 침 발라 놓으면 장땡이었던 것이다. 남의 일에 눈독을 들였던 비신사적인 행동이었을까? 하지만 다른 권역 작성자들이 작성 기한을 맞추지 못하고 '펑크'를 내버렸을 때 구원투수로 내가 가장 먼저 호출을 받았으니 그만한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신혼여행 중에도 카톡으로 혹시 올지 모를 비상호출을 대기했으니까.


당시에는 주제 선정도 꽤 자유로웠다. 승낙이 떨어지면 마감일까지 길어야 4~5일 정도의 시간이 난다. 승낙을 기다리면 글을 많이 쓸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달 이 일을 하다 보니 업체에서 좋아할 만한 주제에 대한 감이 생겼다. 그래서 승낙이 떨어지기도 전에 원고를 미리 작성했다. 반려 처리되면 애써 쓴 원고를 버려야 하는 위험 부담이 있지만, 그런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나는 주제 선정을 잘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많은 작업량을 소화해 있었다. 말랑에서도 그랬다. 바뚜(Batu)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서 저녁에 한국의 초가을 느낌이 났다. 아내는 튀김 주전부리로 유명한 분식점에서 온갖 튀김을 잔뜩 골라놓고, 나는 중동부유럽과 인도-남아시아 권역의 주제를 시트에 올려놓고 그 자리에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급여를 정산할 때 이 업무를 총괄하는 후배가 놀란 듯이 이렇게 말했다.


형님, 신혼여행 중이라면서 '열일' 하셨네요.



나는 원고를 한 편 마무리하고 나면 "오늘 밤 숙박비는 벌었네"라는 자세로 이 일에 임했다. 이름 없는 글을 쓰고는 있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노력을 인정받게 될 날이 올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졌다. 게다가 신혼여행 중에도 일을 한다는 건 내가 늘 꿈꿔왔던 디지털 노마드의 삶에 다가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내는 현지 가이드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다음날 있을 트레킹 예약을 확인했다. 우리는 바뉴왕이 숙소에 짐을 풀고, 해뜨기도 전에 일어나서 백두산 높이의 화산 분화구에 오르는 산행에 나서기로 되어있었다. 블루 파이어로 유명한 카와 이젠(Kawah Ijen)은 활화산 분화구의 칼데라호인데 유황을 잔뜩 머금어서 물 색깔이 청록색이다. 해발고도 2000미터 안내판이 보이고도 한참을 걸어 올라가서야 정상에 다다랐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안개가 자욱했고 비까지 내렸다. 온몸이 곧 흠뻑 젖었다. 적도 지방에 반갑지 않은 추위가 엄습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모닥불을 피워댔다. 그러다 산불이라도 나면 어쩔 거냐고 수군거리던 사람들도 곧 불나방처럼 모닥불로 모여들었다. 아내와 나도 서양인 관광객 틈바구니에 끼어 말없이 모닥불 앞에 빙 둘러섰다. 스위스 같은 추운 나라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백인 여자 한 명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춥긴 정말 추웠나 보다. 우리 부부는 아직도 그때 이야기를 한다. 발리에서 보낸 시간은 별로 기억이 안 나는데 화산 분화구에서 비를 맞았던 그날은 생생하다. 그리고 그날 못 본 블루 파이어를 다시 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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