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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Sep 17. 2024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 손자가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서가


"영감, 같이 가자고 하더니만 뭐가 좋다고 먼저 가서 그리 누워있소"


할머니께서는 앨범 속 할아버지 사진을 보시다가 그리움에 복받쳐 중얼거리십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살며시 흘러내립니다.


"나는 학자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인 사람일세"


결혼하기 전에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을 떠올리며, 할머니께서는 나지막이 그 기억을 되뇌십니다.


평교사로 봉직하시면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시고, 대구의 어느 한 사립대학교의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교육자로서 할아버지의 기나긴 인생 여정을 늘 곁에서 지켜보셨던 기억을 손주에게 들려주시다가 시드니의 명물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한 독사진(獨寫眞)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십니다.


"이때가 참 좋은 시절이었소. 영감이 내 사진만 이리 잔뜩 찍어놨다니까," 할머니께서 사진을 보며 웃음을 짓습니다.


할머니께서 그곳이 저 멀리 바다 건너 남반구 시드니라는 건 기억하시지 못합니다.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순간들만이 할머니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을 뿐, 장소는 이제 희미해져 버린 듯했습니다.




저널들이 가득한 외갓집 할아버지의 서가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저널은 할머니께서 주무시는 안방 서가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영감이 공부하느라 비싼 책들을 이리 많이 모아놨다니까"


어릴 적 외가가 신암동에 있을 때, 꼬꼬마였던 제 눈에 띄지 않던 저널이 이제는 늦깎이 대학원생이 된 손주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귀하디귀한 그 책들은 이제 더 이상 펼쳐지지 않지만, 책 속에 담긴 할아버지의 평생을 바친 노력과 열정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휑한 경산집에 홀로 계시면서 매일 그 서가를 스칠 때마다, 할아버지의 영혼이 담긴 오래된 책들이 주는 묵직한 존재감으로 그분이 아직도 곁에 있음을 느끼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본가(本家)에 있는 서가 한편에는 제게도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고이 간직한 소중한 책 몇 권이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할머니 홀로 계시는 경산 외갓집. 할아버지와 책을 사려고 대구로 갔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제가 이슬람교에 입교하겠다며 아랍어과에 진학한 후 부모님과 종교 문제로 다툼이 잦아졌습니다.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외가에 내려갔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종교를 뭘 믿든지 간에 귀는 늘 열어두고 홍위병이 되지 않아야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네"라고 말씀하시고는 동생은 놔두고 저만 데리고 대구 시내의 대형 서점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슬람에 관련된 책 몇 권을 사주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홍위병'은 다름 아닌 근본주의(根本主義)자였고, 모든 시각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를 손주에게 가르치려고 하셨던 겁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책을 수소문해서 보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제가 중동 이슬람학 분야에서 훌륭한 학자가 되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KTX를 타고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다음날 프랑스어 공인인증시험 델프(DELF) B2 면접이 있었지만, 생전에 할아버지를 뵐 마지막 기회가 이번이라는 걸 직감하고 망설일 시간이 없었습니다. 병실을 들어서니 병마와의 오랜 사투로 야위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목소리도 내기 힘드실 정도로 기력이 쇠하셨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큰손주에게 말씀하시려고 최후의 힘을 짜내고 계셨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말씀대로 훌륭한 학자가 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해버렸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날 임종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떠나기 전에 큰손주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시려고 끝까지 버티셨던 겁니다. 어머니께서는 할아버지의 기일 때마다 절에서 제사를 올리시는데, 청량한 목탁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그 소리 속에서 할아버지의 깊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평생 배움이 강조되는 요즘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지식을 통해 사람들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책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할아버지께서 제게 원하셨던 진정한 학자의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글을 쓰면서도 지식인으로서 본문을 저버리지 않으며 독자들과 소통하겠다는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나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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