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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일상

 참 오랜만에 혼자 바깥에서 나와 숙소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바깥에서 혼자 잠을 이룬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분명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은 마지막 숙소의 밤이 특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감정은 특별한 순간에 드러난다고 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그만큼 바깥에서 자는 것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는 뜻이겠지.


 결혼 초, 회사에 교육담당자로서 외부 연수원 교육 운영을 위해 일요일 저녁에 가서 세팅을 하고 동료와 치맥을 하고 연수원 숙소에서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아주 오래된 것 같은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 재방송이 열한 시 넘어서 하고 있었다. 때마침 첫 회였는데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흘러나왔다. 가수만 울지 않고 화면 속 관객도 나도 울었다. 침대에 누워 등을 숙소 벽에 기대서 어둠 속 TV 화면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다. 행위의 경험만 기억에 남아있다.


 오랜 여행 끝에 알게 된 것은 여행은 결국에 어디론가 돌아오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정주라는 도박을 선택한 이후에 어쩌면 생활습관처럼 용불용설처럼 남게 된 거주의 방식이고,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주가 익숙해졌고, 유목민과 같이 계속된 이동의 경험은 어릴 적 습관을 거스르기 때문에 자주 집과 먹는 것을 바꾸는 게 위험하고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유목민조차도 아마도 먹이에 따라, 계절에 따라 철새처럼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단일 장소로서가 아닌 몇 군데의 집으로서 장소를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익숙한 곳이 기억나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낯선 곳에 묘한 집중력이 생길 때 생은 새로 태어나고 또한 위협도 드러나게 된다. 


 집 바깥 숙소에서 집을 생각해 본다. 아내, 그리고 딸. 아내는 '모하고 있냐'는 내 카톡에 아이를 재우고 있다'며 쉿 이모티콘을 보낸다. '기러기 1일 차가 어떻냐'라고 묻는다. 500여 일 된 딸의 육아에 오른쪽 무릎에 보호대를 하고 특히 어깨가 쑤신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아내에게 별로 해준 일이 없다. 자주 그렇듯 나는 내가 바뀌지 않으면 시켜서 뭘 바꿔보려고 하는 사람이 못되다 보니, 혹은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주변 사람은 힘들다. 


 임사체험처럼 집의 유기적 연결망에서 벗어난 하루에 보통의 하루를 생각한다. 며칠을 늦은 귀가를 하고 잠든 아이를 보며 깨지 않게 얼굴을 쓰다듬으면 '쓰다듬는 게 예쁘다고 하는 게 육아가 아니다. 할아버지도 아니고'라는 아내의 말에 뜨끔한다. 뜨끔할 뿐 쉽게 뭘 달리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 생각의 집이 쉬 이주를 하지 않는다. 


 여행, 작고한 신영복 선생의 말처럼 가장 먼 여행은 머리와 가슴 그리고 발까지 거리이다.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발로 행동하는 것이 가장 멀다는 것, 내 집을 이루는 신체의 부분도 유영하지 못하고 신체의 궤적도 달리하지 못하는 생각의 정주에 기댄 못난 행동들이다. 


 여행이 결국 돌아오는 것이라는 것은 어차피 돌아올 것이니 갈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 정 반대로 돌아다녔던 궤적이 생각의 정주를 풀고, 생각의 숙소를 열어준다. 숙소를 거쳐 숙성된 생각들, 자주 행동하지 않으면 또다시 고인 집이 된다. 


 게다가 숙소는 항상 목이 칼칼하다. 머리로는 그리고 사진으로는 경험하지 못하는 공간의 두려움과 말뿐이고 행동을 하지 않았던 굳은 생각의 고집은 묘한 쌍곡선을 이룬다. 칼칼한 목을 경험하고 나서야 나는 행동을 수정할 그나마의 가능성이 있는 숱한 인간이었다. 알았다면 집이 거두고 있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관계의 공간을 행동으로 연결해야 한다. 


 오늘 집으로 돌아간다. 조금 숙성된 생각만을 바라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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