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과 한강물의 일상
김창열 화백의 시네마 에세이,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이수 아트나인에서 봤다. 말수가 없거나 말이 느린 그의 이야기, 말보다 이미지가, 말보다 음악이 더 가득 찬 영화에서 그의 이야기에는 '말' 주변에 그의 얼굴과 몸이 연결되어있다. 침묵과 멈춤은 의미를 충분이 전달한다. 그에게 있어 근원은 어디이고, 그는 왜 그렇게 모든 이들과 '틈'을 보여왔던 것일까. 그는 모국어인 한국어를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몸이 닿고, 그가 정착했던 프랑스어로 말했다. 그 틈은 그였다. 그는 결국에 규정되지 않은 그 무엇을 통해 규정되지 못한 그를 표현했을 것이다.
그는 물방울을 그렸다. 생명이 근원이 물에서 왔고, 우리는 알 수 없는 욕망의 바닷속에서 첨벙이다 삶을 다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물에 빠지면 죽음을 당하는 인간의 숨이라는 역설이 있다. 물리적인 물을 피하더라도 결국 죽음이라는 필연 속에 당한 수많은 우연의 물방울들이 삶의 궤적을 생산해간다. 영화에서 보듯이 그는 그가 원치 않았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그의 근본을 삭제당했다. 그의 고향은 땅으로 존재하나 몸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맹산'이라는 곳은 이미지로 있으나 만질 수 없는 곳이다. 그가 한국 사회와 세계사적 사건 속에 표류하며 닿았던 뉴욕, 그리고 파리가 있다. 그가 어떤 사연으로든 정착하게 된 파리와 풍요로워 낯설었던 뉴욕을 피하려고 했던 그 만의 사정, 몇 장의 옛 사진에 보이는 청년으로서 그의 올라온 입꼬리와 자신 있는 눈매에서 그가 과연 언제부터 말을 잊고 이미지를 생산해 왔는가 가늠해보게 된다. 곧, 거꾸로 말하면, 이미지가 가득한 시대 수많은 텍스트 속에서 나의 언어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그는 우매하기 때문에 물방울 하나만 잡고 늘어졌다고 했다. 물방울을 통해 그는 삶과 역사를 드러내려 했다. 그 옆에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전쟁통에 그 옆에서 포탄에 터져서 삶이 흙으로 젖어든 사람들, 그는 물을 결국 그리지 못하고 방울을 고집스럽게 그렸고, 수많은 물속에서도 섞이지 않는 방울을 기억해 내고 싶었다. 애도로도, 국가의 위로로도, 가족의 사랑과 누군가로의 우애로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마주해야 할 삶의 괴로움이었다. 그가 말년에 성찰하고 있는 '너무 진지했었나?'라는 그의 토로는 이후에 그에게 또 다른 침묵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자기만의 언어가 박제된 박물관처럼 그의 언어가 걸린 그 시절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관심과 무관심, 찬사와 비평, 혹은 기사거리와 권력의 수단으로 전유하게 될 것이다.
영화는 상당폭 여운을 음악으로 이어가며, 이미지로 연결한다. 그 어색하지 않음이 매력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어디를 갈지 헤맸다. 시골에서 서울살이를 처음 했던 곳 사당동과 이수, 89번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만 지나도 두근거렸던 국민학교 시절, 어머니와 이수역의 시장을 갔다가 오후반 수업에 늦을까 전전긍긍했던 그 감정이 여전히 떠오른다. 융통성이 없다며 나무라던 어머니의 마음이 지금도 느껴진다. 사당동의 사글셋방에 살던 나에게 이수는 너무 먼 곳이자 미지의 세계였다. 그 서울의 낯섦은 여전한 회귀의 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왜 사당과 이수에 대한 아련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일까, 이제는 사라진 사글셋방의 모습, 오전반과 오후반에 따라서 거닐던 그곳을 오늘도 가고야 말았다. 놀이터는 그대로 있는데, 내가 살던 그 건물은 어디 인지, 발걸음의 크기로 가늠할 수 없는 지금, 나는 그 거리를 서울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는지 모른다.
서울은 온갖 이방인들의 세계이다. 이곳에 이주를 한 이들이건, 수많은 개발의 언어 속에 상전벽해하는 서울이 낯선 이들이건, 경제적 욕망을 한 꺼풀 벗기면 삶의 기억이 둥둥 떠오른다. 모두가 다 변해가는 곳에서 또 다른 기억으로 자위하던 그 다른 곳을 경제적 가치로 치환하던 살아가야 하는 서울의 모습, 그 낯섦을 익숙함이라고 여기기에는 살아왔던 인간의 몸은 쉽게 적응할 수는 없다. 20여 km 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들어간다.
어두워진 서울에 물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날씨를 지나쳐, 불멍이 아닌 물 멍 같은 한강 고수부지를 지난다. 그 넓은 구역 속에 수많은 사람들은 걸음으로 자전거로 지나쳐가고, 물은 나를 밀어 올리는 것 같다가도, 나를 빠뜨릴 것 같다. 물방울이 아닌 물, 화백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파편의 공간에 사람들은 물로 엮어서 삶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가 스며들도록 그리려고 했던 물의 사라짐과 자국, 그는 죽음 곁에서 죽었던 이들의 자국을 그려내기도 했지만, 가득 찰 수 없는 삶과 삶의 좁은 여울, 그 간격만큼 사람들은 물결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