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t_Daily Report
코로나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이때, 바깥보다 집에서 밥을 먹는다. 아내는 개학이 미뤄지고 나는 강의나 모임들이 줄줄이 취소가 된다. 3월의 특수를 누려야 하는 대학교에는 썰렁하다. 학위 논문의 행정처리를 위해 아내와 대학원 사무실에 들러 등록을 마치고 집에서 밥을 먹으려다가 오랜만에 학교 서문에 있는 식당에 갔다. 절반 이상 닫은 식당 중에서 그나마 사람이 있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소갈비찜과 청국장을 시켰다. 달달한 대학교 앞 식당의 맛이었다. 그러고 보니 회사를 다니다가 다시 대학원에 들어왔을 때 대학원 동료들이 정말 맛있다는 곳에 갔는데 나는 너무 달고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 대학교 친구들과 그곳에 갔더니 왜 이리 맛없는 곳에 왔냐며 뭐라고 했었다. '자본'이 가진 힘은 참으로 무섭다.
99년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 가장 싼 밥 가격이 1,100원이었다. 그것도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몰래 식권 하나로 밥을 많이 퍼서 친구들과 나눠먹고 남은 밥값을 술값으로 쓰기도 했었다. 그런 친구들이 회사에 들어가고 기성이 되어가면서 다양한 직업군이 생겼겠지만 대부분 중위소득 이상의 돈을 벌게 되고 기념일이면 맛있는 곳으로, 일반적으로 한 끼에 만원 전후의 밥집을 찾다 보니 입맛이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어릴 때 가난 때문인지 기름진 것을 원래 부모님이 싫어하셨는지, 삼겹살, 회의 뱃살 같은 지방이 많은 부위를 느끼해서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님의 자수성가로 여유가 있는 친구는 항상 나에게 '이게 맛있는 부위야, 이게 비싼 거야' 자주 이야기를 해줬었다. 나는 어릴 때는 아마도 착해 보이려고 닭다리보다 닭가슴살이 맛있다고 했었고, 다른 기름진 부위는 솔직히 잘 먹지 못한 거였는데 그 친구와 회사를 같이 다니며 자주 어울리다 보니 참치 뱃살, 홍어 간 '애', 성게알, 뭐 기타 이런저런 비싼 부위를 많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느끼한 맛으로만 생각될 뿐 깊은 맛이거나 값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상황으로 회사를 그만둔 뒤에 대학교 앞에 음식점을 가보니 그 맛이 달라짐을, 그것보다 내 입맛이 변했음을 알게 되었다.
아내와 점심을 먹고 역시 사람이 거의 없는 학교 근처의 배스킨라빈스 31에 갔다. 아내와 나의 고등학교 때부터 나왔을 배스킨라빈스는 지금도 비싼 편이지만 그때는 정말 비싼 아이스크림이었다. 누나와 내가 3가지 맛을 담는 파인트를 가끔 먹었을 때도 큰 마음먹고 샀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밥을 먹고 디저트를 먹을 정도의 여유가 있는 삶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거기에는 삶의 변화만큼 잊게 되는 것도 많음을 알려 준다.
저녁에는 오랜만에 사람들과 모임이 있다. 아내는 술 먹는 것을 싫어하고 모임에서 늦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기사 나도 그렇지 않겠는가. 저녁을 홀로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둘 다 좋아하는 인스턴트 식품 비빔면을 끓였다. 비빔면은 이런저런 다른 방법도 있다지만 면을 적절히 익히고 찬물도 잘 헹구고 물기를 제거한 뒤에 원래 있는 소스만 잘 비벼주는 게 제일 맛이 좋다고 생각한다. 코카콜라의 재료 배합비율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코카콜라가 야심 차게 맛을 바꾸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펩시에게 잠시 밀리기도 했다. 코카콜라는 다시 예전과 같은 맛으로 바꾸었다. 그처럼 변하지 않은 맛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문화적 습성을 반복하는 기제로서 자본의 역할일 수도 있지만 팔도 비빔면이 다른 브랜드의 비빔면보다 항상 조금은 더 높은 가격으로, 그 점유율을 유지하는 데에는 인간이 가진 맛의 민감성, 친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위험이나 고려를 꺼리는 성향 - 휴리스틱스라고도 하는데 - 을 잘 알 수 있다. 아주 오래된 맛의 비빔면을 먹고 디저트를 준비했다. 학교 급식이나 단체 생활이 코로나로 줄어들면서 그때 출하시기를 맞춘 딸기나 저장이 안 되는 채소, 과일류 가격이 많이 저렴해진 것 같다. 플라스틱 네 박스 딸기가 만 원이라니, 꼭지를 다듬어서 아내와 오후에 간단히 요기를 했다.
코로나 대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상당히 익숙해지면서 지루해진 면도 없잖은 것이다. 수요일 모임에서 사람들을 만났는데 식당에 사람이 꽤나 있었다. 주꾸미 숙회와 굴비(부세) 구이로 안주를 하며 술을 마셨다. 이제 그들과 함께 안 지도 10년이 다되어 간다. 이번에 10주년 행사를 한다고 생각했다가 코로나 여파로 모두 물 건너가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회사를 그만두거나 혹은 기존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 계기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들을 만나서였다.
나는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질문, 곧 인문학의 질문인데 아래와 같다.
첫째, 왜 사는가?
둘째, 삶은 무엇인가?
셋째, 어떻게 사는 것인가?
첫째 왜 사는가는 나는 무신론자가 되면서 어느 정도 편해졌다. 나는 오랫동안 기독교도로서 살아왔었고 끝없이 나에게 반문을 하거나 신에게 갈구했었다. 왜 나는 믿음의 확신을 얻지 못하는가? 왜 나는 구원의 징표를 얻을 수 없는가, 신은 왜 나에게 방언을 주지 않는가? 그리고 윤리적으로 기독교의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술도 자주 마시고 일요일에만 회개를 하고 바깥에서는 더 옳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데, 매주 한 번 고개를 조아린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오갔었다. 이는 둘째 질문인 삶은 무엇인가와도 연결되는데 삶의 목적이나 삶의 방향은 근본적으로 '허무함'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신을 만들어진 인간의 관념적 산물로 생각했을 때 어느 순간 신은 인간 집단이 만들어낸 신념이 아니라 인간을 통제하는 권력으로 변화하게 되고, 그것이 현실 세계의 권력과 만나서 신의 대리자들의 표현형으로 보이는 규칙을 통해 인간은 신에게 복종함을 유비적으로 드러내도록 강요받게 된다. 그것을 열반으로 혹은 영생으로 아님 가문의 명예이던 무엇으로 되더라도 인간은 그냥 인간이며 생명체일 뿐인데 '무엇'을 위한 목표로 달려가는 존재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것에서 비껴 나오기로 생각했을 때 더 이상 영생이나 열반을 위한 준비된 시간으로서 현재를 대하지 않고, 오직 현재로 대할 수 있을 때 삶의 목적과 방향은 상당 부분 수정이 가능해졌다. 서른 중반 그 시절, 신에게 의탁하고 잘못을 회개하던 오래된 버릇에서 벗어나 휴리스틱스를 없애고 새로운 생활 방식과 언어 양식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대는 여행이라는 시간이나 퇴직이라는 시점이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셋째 어떻게 사는 것인가에 대해서 나는 이들과 어울리면서 동시대의 자본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는 목적이나 방향이 없더라도 현재의 충실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로 귀결되는데 이날 함께 소주를 마시 한 명은 상당한 부를 소유한 분이고 한 사람은 금융업을 오래 해서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이 가진 생활세계의 방식이나 삶의 태도는 나와는 사뭇 달랐고 이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차를 의미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직장이라는 곳은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월급을 받는 것이었고,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하거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나는 그것에 별 관심이 없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렇게 다들 '자본'을 주요 가치로 두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어려운 일이며 자본이 많다고 해서 행복의 양으로 비례하지 않음을 - 근본적 절대 빈곤은 개인보다는 제도의 문제로서 해결책이 필요하지만 - 그들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활 방식으로서 나는 자본이 아닌 나다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했고 여전히 그렇게 만족스러운 삶을 살지도 나다움을 자기표현으로서 직업에 정확히 정착한 것도 아니지만 나름의 삶의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과의 인연은 평생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며칠씩 다시금 삶을 이야기하는 여행이나 모임을 가질 것이다. 그때 또다시 술도 마시고 음식도 먹는다. 자본에 익숙해지는 입맛에서 느껴졌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 격차에 대한 고민은 자족적 삶에서 성찰의 삶으로 변화를 가지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과의 가치관 차이에서 사회와 관계를 알아가기도 한다. 다만 서로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가치가 아닌 존재로서 관계가 쭉 이어가길 내심 바라며 바람을 너머서 행동하는 것이 내가 할 삶의 흐려질 자국 남김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