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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_ 장정욱[물속에 꽂아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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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 꽂아둔 책/장정욱


그는 물속에서 책 한 권을 건져내었다.


물빛이 바랜 에필로그와

물빛에 녹아든 마지막 구절을 찾고 있다


제목과 지은이 모두 지워진 책은

바닥의 평온을 읽기 시작했는지

오랫동안 물속에 고립되었다


의미가 다 빠져나간 줄거리

흐르고 흐르면

다음의 봄이 오고 말 텐데


텅 빈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무릎이 허물어지도록 흐릿해진 밑줄에 몰두하는


뻑뻑한 밤 


건져 올린 책 모서리에 여백마저 흩어지면

더는 기억하지 못할 눈망울로

책 속 주인공이 그를 바라보았다


 시인은 물속에서 책을 건져내었고 그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에필로그까지 읽어 내려가도 누가 그 이야기를 지었는지, 그게 왜 쓰여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 책에 있는 수많은 삶의 굴곡들이 사라져서 나름 편안한 물이 되는 것도 같았습니다. 혹은 이미 이야기는 사라졌지만 물이 겪어내었던 밑줄의 상처만 남아있어 고립된 물이 되는 것도 같았습니다. 가장 안락한 삶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으며 이야기할 것도 없는 삶이겠으나, 그것은 편안함을 가장한 고립감이거나, 건조한 편안함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다 괜찮을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합니다. 흐르고 흘러 나의 겨울이 지나가서 누구나 밝다 하는 ‘봄’이 오고야 말텐데, 무릎이 허물어지도록 사라지지 않는 밑줄의 무게는 물같이 어두운 밤이 오면 눈물도 흐르지 않는 뻑뻑한 눈으로 텅 빈 하늘을 응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 눈망울로 마지막으로 이제는 여백도 없는 투명한 책인 그의 거울 앞에 멈추어 그를 바라봅니다. 그 어두웠던 물속에 그려진 이야기와 밑줄은 그의 모든 책임도, 혹은 그의 의도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삶의 평안함은 어쩌면 삶의 끝에서야 찾아오는 인식 불가의 상황이겠죠, 끌어올린 말, 눈망울, 음성 모든 이야기가 사라져도 남은 그, 한순간도 타자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던 나. 나를 만들어온 타자와 타자에 겹쳐진 나, 그 흐릿한 경계의 물속에 나와 만나는 나, 그와 만나는 내가 그저 조심스럽게 내미는 것은 해결책과 섣부른 위로가 아닌 뻑뻑해지는 밤을 함께할 응시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누구나 바라는 봄도, 두터운 경험도, 어떤 종류의 평안함도 아닌 물속에 꽂아두었던 책을 함께 그저 바라보는 일인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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