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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_김선우[우리말고 또누가 이 밥그릇에누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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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 김선우


이 집 한 채는

쥐들의 밥그릇

바퀴벌레들의 밥그릇

이 방을 관 삼아 누운

오래 전 죽은 자의 밥그릇

추억의, 욕창을 앓는 세월의 밥그릇

맵고 짠 눈물 찐득찐득 흘려대던

병든 복숭아나무의 밥그릇

멍든 구름의 밥그릇

상처들의,

이 집 한그릇

밥그릇 텅텅 비면 배고플까봐

그대와 나 밥그릇 속에 눕네

그대에게서 아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눈물 많은 밥냄새 나네


 시인은 삶을 밥을 그리고 밥을 함께 먹고 삶을 살아낸 사람들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다 허물어지는 곳이라고 비바람 피할 곳이 있다면, 쥐들이 갉아먹는 소리가 들리고, 바퀴벌레가 몸을 타고 들어와도 집은 그 어두운 밖보다 밝습니다. 그렇지만 집은 누군가의 임종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고, 임종을 맞는 자들의 슬픔이 묻어있는 곳이고, 삶의 흐린 기억들이 가득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 누구는 떠나갑니다. 가족 전체가 새 집으로 혹은 더 낡은 기억이 있는 옛 집으로 이사를 갈 때도 있습니다. 이삿짐이 모두 빠지고, 텅 빈 집안은 의외로 넓은 걸 보면서도 마음은 조그마해지고, 헛헛해집니다. 삶과 밥이 뒤엉키며 들러붙으며 썩고 발효되고 머릿속에 쌓여가는 그곳, 이제는 이삿짐 꾼들이나 그곳에서 온 몸을 비비던 사람들이나 신발을 신고 바닥을 밟습니다. 밥그릇은 달그락 거리는 설거지하던 누군가의 콧노래 소리였고, 밥그릇을 만들려고 무릎을 꿇던 이의 변명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 남자는 재개발 허가가 난 옛 집에 사는 엄마가 미련해 보이기도 했고, 오래된 냉장고에 유통기한을 알 수 없이 비닐에 쌓인 수많은 먹을거리들이 추접스럽다 생각했습니다. 그는 “엄마는 이 집이 지겹지도 않아?”라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비닐에 쌓인 것들을 다시 밀어 넣으며 “집이 지겨운 게 어딨어, 집은 집이지.”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 한 개비를 피우러 대문을 열던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반항하며 대문을 찼던 것을 기억해 냅니다. 그 대문은 더 이상 재개발에 넘겨질 단순한 고철더미가 아닙니다. 


 밥을 나누는 일은 그만큼 다양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이 무뎌진 엄마의 말도, 엄마에게는 무딘 그 기억이 싫은 남자의 토로도 무엇이 옳다거나 삶의 경중과 말의 깊이를 저는 따질 수 없습니다. 살아남기에 바빴던, 그 장면에 그대로 박제되었던 혹은 자기감정을 따르기보다 의무를 감내하던 엄마에게 그 시간은 그저 시간일 뿐 되돌려보고 싶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남자는 궁색하다 여기고, 반찬 투정을 일삼던 그때, 이제는 먹고살만한 시간이 되었음에도 그곳에 박제된 적도 없는 괴로웠지만 수고스럽지는 않았을 그는 엄마를 깨우치려고도 합니다. 


 한 밥 상 속에, 밥그릇 한 톨의 쌀마다 소중함, 서러움이 함께 있습니다. 밥은 소중합니다. 그렇지만 “다 밥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다”라고 삶을 정의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가정도 없습니다. “밥만 먹고살 수는 없잖아요.” 프랑스 68 혁명의 기치이기도 합니다. 밥을 당연하다 여기는 것만큼 비껴나간 삶도 없습니다. 밥을 먹는 행위와 밥은 왜 먹어야 하는가 하는 사유가 인간에게 주어진 양날의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을 만들고, 내 생각 에너지의 원천이 되는 밥. 그리고 밥을 짓고 밥에 맛을 더하고 기억을 입히는 사람들, 그것은 가족도 친구도 어떻게든 엮인 타인도 될 수 있습니다. 밥은 얼굴인가 봅니다. 눈물 콧물 웃음 실소 탄성이 얼굴 주름살만큼, 밥알에 톡톡히 스며들어 있습니다. 날카로운 숟가락으로 밥 한 술 뜨다 생각해 봅니다. 숟가락 뒷면 볼록한 얼굴을 봅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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