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지붕 위에 내려앉은 시간 - 두브로브니크에서의 하

스르지 산 위에 서니, 세상이 잠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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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도시는, ‘본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두브로브니크가 바로 그런 곳이다. 스르지 산 정상에 선 순간, 도시는 붉은 지붕을 한 겹 한 겹 펼쳐 보이며 마치 오래된 책을 건네듯 조용히 다가온다.


아드리아해 고요한 물결은 도시의 그림자를 품고, 성벽은 수백 년의 기억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도시도 사람처럼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구나.


“회복”이라는 말이 도시가 되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두브로브니크는 수차례 무너졌다. 지진, 전쟁, 화재, 침략, 포탄… 그러나 매번 다시 일어섰다.


붉은 지붕을 다시 올리고, 성벽의 구멍을 메우고, 항구를 다시 열었다.


그 과정이 아름다워서 사람들은 두브로브니크를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부른다. 빛이 난다고 해서가 아니라, 슬픔을 이겨내고 다시 살아난 도시이기 때문이다.


성벽 위를 걷는다는 것은 결국 ‘나’를 걷는 일이다


올드타운의 골목을 걷다 보면 불현듯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다.


어딘가에 남아 있을 누군가의 발걸음, 성벽에 스며든 바람의 결, 전쟁 중에도 꺼지지 않았던 등불.


그 모든 것이 도시 위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나는 그 길을 걷는 동안 내 마음에도 작은 틈으로 바람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일들, 미뤄두었던 감정들, 말하지 못했던 마음들.


여행은 종종 그런 것들을 끌어올려 ‘빛’으로 꺼내주는 일이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순간, 삶이 정리되었다


스르지 산에서 내려다본 올드타운은 하나의 풍경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멀리서 보니 복잡했던 골목도 하나의 흐름이 되고, 엇갈린 지붕도 하나의 패턴이 되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바로 옆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선들이 조금 멀어지면 비로소 하나의 그림으로 연결되는 것.


두브로브니크는 그 사실을 조용히 보여주는 도시였다.


“아드리아해의 푸른빛은 단순한 바다가 아니다. 시간과 바람, 그리고 살아온 도시의 기억이 모두 녹아 있는 한 겹의 빛이다. 그 앞에 서면 누구라도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를 잠시 잊고,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마음 깊은 곳에서 고요히 빛난다.


붉은 지붕과 흰 성벽이 바다에 비칠 때, 두브로브니크는 더 이상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감정이 된다. 바다 위에 쌓인 세월과, 세월을 품은 도시가 서로에게 기댄 채 오늘도 같은 빛을 낸다.


여행자는 그 순간을 ‘로망’이라 부르고, 나는 그 순간을 ‘나를 되찾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여행은 끝났지만, 마음은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


도시를 떠나오는 길, 결국 마음에 남은 것은 성벽의 돌 색깔도, 붉은 지붕도, 바다 빛도 아니었다.


오래 버티고 다시 일어섰던 그 도시의 강인한 생명력이었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두브로브니크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조금은 가볍게 내려놓는지 모른다.


나 또한 그랬다. 도시 앞에 서 있는 동안, 나는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2025년 11월 28일

- 신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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