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오래전에 섬 하나를 만들어 놓고
바다는 오래전에 섬 하나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바람을 얹고, 윤선도라는 한 사람을 보내 자연과 시가 공존하는 공간을 완성했다. 그곳이 바로 보길도였다.
세연정 앞에 서면 물은 잔잔히 흔들리고, 바위는 제자리를 지키며, 정자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바람을 품는다. 사람의 손이 닿은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은 풍경. 어쩌면 윤선도는 자연을 조경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말을 옮겨 적은 것뿐인지도 모른다.
곡수당 기둥을 스치는 빛은 오래된 나무의 결을 따라 부드럽게 흐른다. 그 위로 한때 흘렀던 물소리와 시인의 숨결도 아직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섬의 겨울은 조용하다. 그래서 억새가 바람 사이로 부서지는 소리도 선명하다. 파도가 돌을 굴리는 소리, 해변을 스치는 작은 바람, 멀리서 들리는 배의 엔진음까지— 모든 것이 삶의 템포를 잠시 멈춰 세운다.
예송리 해변에서 조약돌을 한 줌 쥐었다. 햇빛에 데워진 돌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 고요함이 좋아 나는 오래도록 자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보길도의 겨울 바다는 철학도, 설명도, 다짐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녹아내린다.
돌아오는 길, 붉은 동백꽃 한 송이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꽃잎 하나에 이 섬의 시간이 담겨 있는 듯했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지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귀양지였고, 또 누군가에게는 삶을 돌아보는 자리가 되는 곳. 보길도는 그런 섬이다.
바람이 시를 쓰고, 물은 시를 이어주며, 사람은 시 속을 걸어가는 섬.
2025년 12월 8일
-신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