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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절벽 - 카파도키아와 파묵칼레

흘러가라. 그러나 잊지 말라



지구의 나이를 가장 정확히 말해주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바위와 물이다. 터키의 카파도키아와 파묵칼레는 그 두 가지 언어로 시간을 기록한 땅이다.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기이한 바위들이 숲처럼 솟아오른 신비의 공간이다. 수만 년 동안 화산재와 바람, 비가 빚어낸 절벽의 도시. 그 속에서 사람들은 돌을 파고 들어가 집을 짓고, 동굴 속에 교회를 세우며 신을 찾았다. 그들은 바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안으로 자신을 숨기며 다시 태어났다. 어쩌면 인간이 처음으로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배운 곳이 이곳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벽에 열기구를 탔다. 하늘로 떠오르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온 세상이 돌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노을빛이 바위의 곡선을 따라 흐르고, 그 위로 다른 열기구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바람도, 사람도, 시간도 모두 느리게 움직였다. 그 고요 속에서 오래된 문장을 떠올렸다. “시간은 돌 속에 머물러 있다.” 돌의 표면엔 바람의 흔적이, 그 아래엔 인간의 기도가 새겨져 있었다.


카파도키아의 바위는 침묵하지만, 그 침묵은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곳 동굴 교회의 벽화에는 천 년 전 그려진 신앙의 색채가 여전히 선명하다. 붉은 안료는 거친 바람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남긴 간절한 믿음의 흔적이었다. 벽화 앞에서 오랫동안 멈춰 섰다. 그 색을 바라보는 동안, 시간이 나를 응시하는 듯했다.


며칠 뒤, 또 다른 ‘시간의 절벽’을 향해 갔다. 파묵칼레(Pamukkale), ‘목화 성’이라는 뜻의 하얀 산이다. 뜨거운 온천수가 수천 년간 흘러내리며 석회질을 쌓아 만든 계단식 단구 위로 맑은 물이 얕게 고여 있었다. 햇살을 받으면 물은 은빛으로 반짝였고, 발을 담그면 따뜻한 온기가 발끝에서부터 번졌다. 그 순간, 시간을 몸으로 감각하는 기분이 들었다.


파묵칼레의 온천수는 지금도 쉬지 않고 흐른다. 한 방울, 한 방울이 쌓여 이 거대한 하얀 계단을 만들었다. 인간은 하루를 살지만, 물은 천년을 흐른다. 그 아득한 차이를 깨닫는 순간, 삶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해 질 녘, 석양이 하얀 절벽을 붉게 물들였다. 그 빛은 돌 위에서 천천히 식어가며 마치 ‘시간이 잠드는 장면’을 연출했다. 돌은 침묵으로 세월을 견디고, 물은 흐름으로 생명을 이어간다. 인간은 그 사이에서 잠시 머무는 존재일 뿐이다.


돌 위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 만큼, 물속에 손을 담글 수 있을 만큼의 시간.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일지도 모른다. 카파도키아의 절벽과 파묵칼레의 계단은 그 사실을 고요히 일깨워준다.


“흘러가라. 그러나 잊지 말라.”




2025년 12월 21일

- 신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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