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랏의 노을은, 끝까지 오른 사람에게만 열린다

튀르키예에서 되찾은 나만의 속도에 관하여


지금은 터키가 아니라 튀르키예라고 불립니다.

이름을 바꿨다는 사실보다, 스스로를 부르는 방식을 되찾았다는 점이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세상이 불러주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오래 불러온 이름으로 서겠다는 선언.

그런 변화는 지도보다 사람의 표정에서 먼저 보입니다.


나는 이스탄불의 발랏이라는 동네를 걸었습니다.

관광객이 몰리는 중심에서 벗어난 곳, 금각만을 따라 형성된 오래된 주거지.

발랏은 처음부터 친절한 동네가 아닙니다.

길은 평평하지 않고 골목은 위로 향합니다.

이곳을 걷는다는 것은 목적지로 가는 일이 아니라, 호흡을 조절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숨이 약간 차오를 즈음, 발랏은 비로소 말을 겁니다.

사람의 시선 높이에 맞춰진 도시. 그래서 고개를 들기보다 옆을 보게 됩니다.

문 앞에 놓인 의자, 말려 걸린 빨래, 반쯤 열린 창문.

관광지가 아닌 '생활의 장면'들이 골목의 표정을 만듭니다.


발랏의 경사는 사람의 속도를 늦춥니다.

속도가 느려지면 말이 줄고, 대신 생각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발랏은 화려한 설명보다 침묵이 어울리는 동네입니다.


골목 어딘가에서 커피 냄새가 납니다.

모래 위에서 끓이는 커피, '쿰다 카흐베(Kumda Kahve)'.

뜨거운 모래는 불꽃처럼 급하지 않습니다.

커피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완성됩니다.


“천천히 끓여주세요. 급하지 않아요.”


이 문장은 주문이 아니라 이 동네에 건네는 인사입니다.

발랏은 그런 사람을 반깁니다.

서두르지 않는 사람, 다 보려 하지 않는 사람, 조금 남겨두는 사람을.


다시 걷습니다.

일부러 지도에 없는 가파른 길을 골라 봅니다.

발랏에서는 힘이 드는 쪽이, 진짜 이 동네가 남아 있는 쪽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곳에 닿습니다.

옥상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이스탄불은 올라오며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른 얼굴입니다.

해가 기울면 벽은 금빛을 머금고 지붕은 어둠을 준비합니다.

완전히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그 찰나의 시간에 앉아 커피를 마십니다.


유리창에 한복을 입은 내 모습이 비칩니다.

이상하게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오래된 것은 오래된 것을 알아보기에, 발랏의 시간과 한복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릅니다.


발랏은 아래에서 시작해 위에서 끝나는 동네입니다.

이곳의 노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습니다.

끝까지 오른 사람에게만, 자신의 속도를 지켜낸 사람에게만 조용히 내어줍니다.


이름을 되찾은 나라에서, 나는 나의 속도를 되찾았습니다.

발랏의 노을은 그렇게, 천천히 오른 사람의 저녁이 됩니다.




2025년 12월 27일

-신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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