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타야만 만날 수 있는 고요의 리듬
하롱베이로 향하는 길은 단순하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 이 여행을 긴 잔상으로 남게 만든다.
반드시 배를 타야만 닿을 수 있다는 것.
이곳은 처음부터 인간의 성급한 발걸음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육지에서 움켜쥐고 있던 세계를 잠시 내려놓고
물 위에 몸을 싣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속도를 낮추게 된다.
하롱베이는 서두르는 이에게
자신의 진면목을 쉽게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배가 나아가면, 산은 비로소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아니, 사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정작 소란스럽게 움직이고 있던 쪽은 나였다는 사실을
물결 위에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수천 개의 석회암 봉우리들이 바다 위에 흩어져 있다.
서로를 밀치지도, 앞서려 경쟁하지도 않는다.
각각의 산은 자신이 머물러야 할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하다.
그 덕분에 풍경은 압도적으로 웅장하면서도 결코 불안하지 않다.
정적 속에 노 젓는 소리가 섞여 든다.
현지 뱃사공은 서서 노를 젓는다.
앉아서도 가능할 텐데, 굳이 서서 온몸으로 균형을 잡으며 물을 가른다.
그 고단하면서도 유연한 뒷모습은
이 물길이 단순한 관광 코스가 아니라
수 세기를 이어온 삶의 엄연한 통로임을 말해준다.
이곳에서 배는 풍경을 가르지 않는다.
그저 풍경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 뿐이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 감각이 깨어나다
하롱베이의 동굴은 예고 없이 나타난다.
“이제 들어간다”는 기별도 없이 풍경은 불쑥 입을 벌린다.
배가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빛은 잠시 자취를 감춘다.
어둠은 길지 않지만, 사람은 그 짧은 찰나에
본능적으로 말을 줄이고 숨을 고른다.
기이한 경험이다.
사방이 막힌 어둠 속에서 우리는 풍경보다 자신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풍경을 허겁지겁 ‘소비’ 해 왔는지,
얼마나 많은 장면을 눈이 아닌 카메라 렌즈로만 박제하며 지나쳤는지
문득 미안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열리는 출구.
빛이 돌아오는 순간, 밖의 세계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조금 전과 같은 산, 같은 물인데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롱베이는 풍경을 보여주기 전에 사람의 감각부터 낮춘다.
그래서 이곳의 풍경은 ‘본다’는 행위보다
‘마주한다’는 고백이 더 어울린다.
설명이 필요 없는 장소
하롱베이에 대해 우리는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지질학적 형성 과정, 수천만 년의 세월, 유네스코라는 거창한 이름들.
그러나 이 모든 수식은 이 풍경 앞에서는 늘 조금씩 늦게 도착한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지형이 생겼는지가 아니라,
이 풍경 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가이다.
하롱베이는 감탄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단한 감동을 짜내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곳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면 사람 쪽에서 먼저 조용해진다.
말이 줄어들고, 생각이 느려지고,
굳이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정의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아지는 상태.
그래서 하롱베이를 다녀온 사람들은 여행 이야기를 하다 자주 멈춘다.
말로 옮기기에는 그때의 공기와 리듬이
너무 미세하고 투명했기 때문이다.
하롱베이가 마음속에 오래 남는 이유
사진 속 하롱베이는 화려하다.
그러나 기억 속 하롱베이는 의외로 고요하다.
돌아와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산의 높이나 규모가 아니다.
배가 잠시 멈췄던 순간의 정적, 노가 물을 밀어내던 규칙적인 소리,
그리고 동굴 안에서 잠깐 사라졌던 찰나의 빛이다.
이곳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지 않는다.
대신, 그곳에서 어떻게 머물렀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하롱베이는 다녀온 직후보다 시간이 흐른 뒤에 더 자주 떠오른다.
일상의 속도가 다시 가팔라질 때,
문득 삶의 회전수를 낮추고 싶어질 때 비로소 생각난다.
하롱베이는 여행지라기보다 하나의 낮은 리듬이다.
그 리듬을 한 번 몸에 담고 돌아오면,
사람은 이전과 같은 속도로만 살아가기는 어려워진다.
배를 타고 깊숙이 들어가야 만나는 풍경.
말을 줄여야만 들리는 공간.
하롱베이는 자연이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사려 깊은 제안이다.
“조금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고.”
2026년 1월 12일
-신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