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_002_공자, 경영을 논하다.

배병삼 글, 푸르메

by 주종문

[공자, 경영을 논하다.]는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받고 있는 [논어]로 대표되는 공자의 사상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조직에 통합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라고 규정한 경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 유교는 인간 세계를 공공영역과 시장 영역으로 나눠볼 따름이다. ]

[유교는 시장에서의 이익 추구를 당연한 것으로 수긍하고 또 적극 권장하기도 한다.

다만 유고가 문제로 삼는 것은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 영역'과 인간애와 사회정의를 핵심으로 하는 '공공영역'이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논어]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공자와 [논어]에 대한 이야기를 명확히 지적하여 속이 시원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논어를 읽으며 저 역시 공자와 [논어]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공자의 유교에 대해 오로지 충효의 봉건 도덕을 가르쳤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고전을 읽는 쪽의 편향이다.

공자의 [논어]에서 말하는 충은 반드시 그 대상을 군주로 한정하지 않다.

효를 중요한 도덕으로 가르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상식적인 효행일 뿐 몸과 생명을 희생하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 미야자키 이치사다,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 ]


우리가 아는 충효, 즉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국가에 충성한다'는 논리가 [논어]에는 없다는 증언이다.

이어지는 대목은 더 충격적이다.

" 공자의 [논어]를 봉건적인 상하관계에서 작용하는 멸사봉공이라는 뜻의 충효를 가르친 책이라고 읽는 것은 오히려 도쿠가와 시대 봉건제에 살았던 일본 사람들이 자기의 봉건사상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과 다름없다."

[ 미야자키 이치사다,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 ]


곧 충효라는 묶음 말의 뿌리는 [논어]가 아니라 일본식 사무라이 전통에 기인하였다는 사실을 일본 학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분노했던 '공자=충효'라는 등식은 [논어]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남의 장단에 춤을 춘 우스꽝스러운 짓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근 40년 겪으면서 우리는 일본의 봉건적 관습이었던 상명하복, 멸사봉공, 대의멸친 따위의 '군국주의적'언어들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하여 마치 조선시대 내내 이 땅의 삶이 그러했던 양 오해했던 것이다.

두 나라가 같이 한자, 한문을 쓰는 통에 그리고 그들의 지배를 받는 통에, 일본식 관습이 마치 우리 전통인양 '사이비 상식'으로 행세했었다는 말이다.

요컨대 충효라는 언어로 익숙한 '부모에 효도=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항등식은 결단코 공자의 [논어]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다. ]


[ 지금까지 공자 학설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부귀 관념'과 '화식(貨殖) 사상'입니다.

사람들은 공자가 '부귀한 자는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어진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반드시 부귀에 대한 생각을 발려라'는 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논어] 20편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그런 뜻의 구절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부귀와 화식에 대해 그런 식의 논단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치 [논어와 주판]


공자가 지향한 삶은 가난함과 부유함의 갈등에서 초탈한 경지였다.

즉 가난하다고 해서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다고 우쭐하지 않는, 해맑고도 여유로운 삶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가난을 높이고 부유함을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 역시 부자가 되려는 물질적 욕망에 휘둘리다가 도리어 사람의 참된 도리를 읽어버리는 바보가 되느니 차라리 담당하게 가난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지, 결코 가난을 숭상하고 부유함을 낮춰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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