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건 아니고 우리집 강아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만남`일 거야. 우리는 우리일 때 나는 나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나는 나일 수 있어. 나 스스로 나 자신의 친구가 되고... (중략) 타인에게서 나를 빌려오고, 기쁘고 영광스럽게도 나를 타인에게 빌려줄 수 있기도 해. 나의 정체성이나 나의 의미라는 것도 그들과 함께한 시간과 삶 속에서 만들어지고, 그들과 함께한 기억 속에 자리 잡을 거야. 정혜윤 <스페인 야간비행> 중.
내가 가장 기억이 남는 만남은 우리 강아지.
지금은 아버지가 됐지만, 당시에는 엄마의 남자친구였던 분이 12월 어느 날 눈보다 일찍 우리에게 내려준 구름이.
구름같이 몽실몽실한 털로 뒤덮여서는 `여긴 어디고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군가` 하는 눈빛으로 낯선 집에서 끙끙대는 그 아담함을 난 죽기 전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너무 작아서 조금 큰 머그컵에 담아놓고 사진을 찍어댔다.
네가 내게, 우리 가족에게 온 지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처음 산책을 가던 날 나는 일상이던 거리의 곳곳이 온통 위험하고 더러운 것 투성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자동차도 사람도, 세상에 태어난 지 반년도 안된 너는 모든 게 두려웠고, 나는 그런 네가 놀라거나 다치지 않을까 무서웠다. 중학교 때 부모님의 이혼 문제로 마음이 복잡할 때, 너무도 어렸던 네가 나보다 더 어린 너에게 감정을 쏟아냈던 저녁들도 기억에 남는다.
선천적으로 귀가 안 좋아서, 고름이 흐르고 냄새를 풍기며 동생과 엄마가 너를 멀리할 때도 나는 품 안에 너를 꼭 끌어안고 잤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데,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너를 무시하는 가족들을 보는 너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마음이 쓰였다. 많이 간지러울 텐데 의미 없이 넥카라를 새벽 내내 긁었을 때도 나는 잠들지 못한 나보다 네가 더 안쓰러웠다.
그런 구름이가 생리를 시작했다. 어김없이 다른 가족들은 방 구석구석에 피를 흘리고 다닌다며 질색했다. 드물게 집에 오는 친아버지는 아예 병든 가축처럼 대했고, 양아버지는 항상 엄마 편만 들었다. 애견용 기저귀를 타고 뒤뚱뒤뚱 걷는 네가 아른거린다. 나는 매일 베란다 쪽에서 자는 너를 늦은 밤 데리고 침대에서 토닥였다.
수의사로부터 생식기 기형이라는 판정을 받고 네가 임신하지 못해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지. 고2 때, 동물 병원에서 중매를 해 어린 수컷 강아지와 맺어준다고 엄마는 덜컥 15만 원을 내밀었다. 그 다음날 밤 그 강아지네 집에 너를 두고 와서 쓸쓸했지만 내심 새끼 강아지들이 탐이 났다. 강아지들이 교미할 때, 서로 심적으로 안정되고 익숙한 공간에서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강아지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준다는 사실을 안 것은 며칠 후의 일이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동생 내지는 딸을 남의 집에 며칠 버려두고 온 기분이었다. 당장 돈에 눈이 멀어 거짓을 나불 댄 애견숍 주인 부부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을 결정한 엄마도 원망스럽고 미웠다. 나는 내 품에서 자는 너를 쓰다듬으며 그 화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떠오르는 부정적인 장면들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발정 난 수캐는 욕정을 들이밀었을 테고, 연약한 우리 아가에게 주인 내외는 임신이 되게 하기 위해 무력을 썼을 테다. 지내는 3일 동안 배변을 못 가리거나 낑낑대고 짖는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는, 다시는 너를 남에게 보내지 않으리라. 꼭 내 품에만 남아있어 주길 하고 바랐다.
어느 날은 집에 모르는 강아지가 와 있었다. 같은 말티즈에 덩치도 비슷했지만 구름이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애견숍에서 데려온 수컷 강아지였다. 동생이 하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간단하고 직관적인 작명이다.
녀석은 냉소적인 구름이와 다르게 애교가 많아 가족들의 사랑을 빨리 받았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구름에게 더 눈길이 갔다. 둘째가 태어나 상대적으로 소외된 느낌을 받는 첫째 같은,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으면 했다. 그때쯤에는 친아버지와 우리가 완전히 별거를 한 채였고, 양아버지는 아예 집에서 눌러 사셨다. 이제 두 강아지도 많이 익숙해졌다. 남자라 그런지 덩치도 더욱 커진 하늘이는 꽤 늠름해졌고, 자연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뤄진 사랑은 인간이 통제하거나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배가 부른 구름이가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여전히 슬펐다. 안 그래도 마른 몸에 새끼를 배고 있다 생각하니 측은했다. 임신을 하지 못한다는 의사의 말은 오진이었을지 몰라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가을의 어느 새벽 종일, 천사 같은 아이 세 마리가 세상에 나왔다. 달과 별은 내가 지은 이름이었고 해를 이름으로 하기는 이상하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첫째의 이름을 한창 토론하던 그날 밤에.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 서운했는지 세상에 나온 지 하루도 안돼 떠나고 만 아이. 구름이가 탯줄을 너무 바싹 자른 것이 화근이었고, 피가 계속 나와 멈추지 않았다. 동물 병원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지혈 말고는 할 게 없다고 했지만 너는 우리의 정성도 저버린 채 떠나고 말았다. 그 모습이 꼭 자는 것 같아 아직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많이 울었다. 고3이던 내가 입시나 진로 문제도 아니고 강아지 때문에, 그 해에 가장 많이 운 일이다.
대학생이 되어 나는 독립을 했다. 밤에 너희들과 함께 잠들지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너희가 없는 것이 퍽 서운했다. 구름이를 데리고 살았다가 한 달도 못가 다시 돌려다 놨다. 알바에 수업에 혼자 두게 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내 욕심이었다.
부모님은 불편하다. 나만 따를 것 같던 동생은 사춘기가 왔다. 오빠라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정도로. 과장이지만, 내가 집에 가는 이유는 강아지들을 보기 위함이다. 집 밥을 먹고 오빠 노릇을 하는 이유도 있지만 신발장부터 나를 반기는 너희들을 행복이라 일컫고 싶다.
강아지의 수명은 15년 정도다. 구름이가 세상에 난 지 7년이 되었고 그렇다면 반 조금 안되게 삶이 남은 것이다.
결혼식은 날짜를 정할 수 있지만, 장례식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행복은 예견되어 있을지 몰라도 불행은 한순간에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이다. 먼 훗날이겠지만, 그때가 되면 많이 후회할 듯싶다. 더 산책을 시켜주지 못한 것. 맛있는 것을 먹이지 못한 것. 한 번이라도 쓰다듬고, 안아줄 걸 하는 부질없는 행동들이 내 가슴을 강타하겠지.
구름 하늘 별. 너무도 사랑스럽고 천진난만한 너희들이 벌써 내 곁을 떠날 것을 생각하는 것은 행복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 단절의 의미로서의 이별은 해 본 경험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처와 여운이 얼마나 깊고 슬플지 짐작할 수 없지만 난 늘 그랬던 것처럼 너희들을 예뻐해 줘야 한다. 그것이 너희들과 내가 만난 이유라고 나는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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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갤러리를 정리하다가 강아지 사진들을 물끄러미 보며 쓴 글이다.
두서도 없고 감성은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못 쓴 글이지만 나중에 이것도 교훈이 되지 않을까 싶어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
나보다 더 작은 내 친구들이자 동생들. 나라는 사람에게 와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