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썼습니다.
5월 4일 오후 1시부터 5월 29일 오후 3시까지 나는 죽어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난 어디에도 없었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렇게 힘들었다는 식의 푸념이나 한탄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매우 경험적이고 주관적으로 쓰겠다.
4일
점심으로 피자를 먹었다. 자취하는 동안 피자를 너무 먹고 싶었다. 부모님과 피자를 먹었는데 기대한 맛은 아니었다. 가기 전 사회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그다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리고 그 평은 엄청난 사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1시부터 주변 환경이 도시가 아니라 산속으로 변해갔다. 그때부터 무서웠다. 희미했던 문장들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는데 꼭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가기 전처럼 떨렸다. 그 얘기를 들은 엄마는 놀이공원 얘기를 했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결국 도착을 하고 군인들이 보였다. 내 또래 애들이 낯선 옷을 입고 낯선 말투를 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코로나 때문에 열을 재고 문진표를 작성하고 나서 돌계단에 줄을 맞춰 앉았다. 내일부터는 줄이 아닌 오와 열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긴장해서 탄산수를 들이켰는데 그 때문에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보아하니 내 이름이 불리기까지는 꽤 걸릴 것 같아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손을 들었다. 조교는 더 화장실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냐고 묻고 우리를 인원들이라고 부르며 안내했다. 운 좋게도 앞서간 사람들에 껴서 먼저 생활관에 들여보내 주는 것 같았다. 나라사랑카드를 찍고 소지품을 맡기고 생활관에 들어갔다. 14명이 흑임자 젤라또 같은 머리를 하고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육군 마크, 부대 마크가 찍힌 보급품들이 차례차례 분출되었고, 실감보다 겁이 더 나기 시작했다. 모르는 곳에서의 모르는 사람들과의 동거.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 보다 그것이 미지의 존재라는 그 사실 하나가 나를 더 무섭게 했다.
5일
근데 결론부터 놓고 보면 그런 건 없었다. 이게 군대인가 싶을 정도로 훈련이나 생활은 아주 편했다. 자유권을 빼앗긴 것 만이 유일한 애로사항이었다. 조교들도 공익이라는 것을 감안해서인지 크게 고통을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난 그들이 불쌍했다. 잠자리는 불편했고 밥은 맛이 없었다. 오기 전 바로 전 기수에서 제대한 친구가 밥이 맛있다는 얘길 듣고 기대했건만, 그 친구의 공익 사유가 저체중이라는 것을 난 잊고 있었다. 밥... 우리 집은 강아지 세 마리를 키운다. 난 그곳의 조리병들과 우리 집 강아지 3마리가 요리 대결을 해도 진지하게 승산이 있다고 봤다. 식사는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이 좀 서러웠다.
잠자리는 불편했지만, 잠은 잘 왔다. 일어나서 주변에 있는 13명의 빡빡이들. 아침 점호를 위해 얼떨떨하게 나가고 오와 열을 맞추어 정렬했다. 우리는 이미 하나의 부품이 되어있었다. 애국가를 부른다는데, 화요일이라고 2절을 제창했다. 다들 가사를 몰라 웅얼대는 것이 웃겼다. 그러나 이런 것에 웃어야 하는 현실이 갑자기 또 슬퍼서 미소를 거두었다.
6일
첫날과 둘째 날은 정말 시간이 안 갔다. 가만히 앉혀놓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때 되면 밥 주고 움직이지도 놀지도 못하게 하니 이건 뭐 고문이 따로 없었다. 차라리 몸이 힘들더라도 시간이 빨리 갔으면 했다. 헌데 6일은 신체검사를 해서 재밌었다. 이런 사소한 활동에 재미를 느끼고 시간이 빨리 간다고 좋아하는 내 모습이 또 금세 처량해진다. 시력을 진짜 대충 쟀는데 0.2 크기의 숫자 하나만 고르고 보이면 0.6 안 보이면 0.2였다. 대위라는 군의관의 계급과 오버랩되어 기분이 묘했다. 시간이 빨리 갔다고 다른 애들과 얘기하며 잠이 들었다.
7일
이때쯤 되니 다들 말도 트고 어느 정도 친해졌지만 천성이 방향감을 상실하고 비틀거리는 나로서는 그다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도, 친하게 지낸 사람도 없었다. 다들 어색하지도 않고 친밀하지도 않은 사이로 지냈다. 이 날은 내가 발에 상처가 생겨서 처음으로 의무대를 갔다. 의무관은 매우 퉁명스러웠다. 며칠 후에 있던 부대의 자체적인 개선사항 설문조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자 그가 많은 병사를 혼자서 상대하기 때문에 이해해달라는 답이 돌아왔다. 여하튼 밴드와 연고를 받았다. 이 날 밥이 뭔지 기억은 안 나도 좀 사람답게 나왔었다.
8일
많이 우울했다. 시간이 안 가니 더 그랬다. 아주 간단하게 한 제식훈련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원래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예비군 훈련장에서 우리는 격리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복지를 받지 못함과 더불어 활동도 제한적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편지를 많이 썼다. 바깥은 어떨까. 내가 없어도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것. 그 사실이 주는 힘이 꽤 셌다.
9~10일
주말이었고 낮잠을 자게 해 줬다. 누워서 손바닥으로 주변을 더듬으며 휴대폰을 찾는 내 모습이 바보 같았다. 휴대폰엔 얼마나 많은 카톡과 연락이 와 있을까? (나중에 확인했는데 뻥 안치고 3개 방한테 와 있었다. 그것도 두 개는 단톡. 혼자인 내 삶 사랑해.) 토요일엔 사람들이 많이 적응했는지 많이 떠들었다. 난 별로 얘기에 끼고 싶지 않았고 책을 보다가 멍하니 앉아 있다를 반복했다. 여자 얘기, 차 얘기, 조교들의 나이 추측이 이어졌고 내 옆에 옆에서 자는 친구가 우리 학교 수학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방에 초등학교 동창도 있었다. 반가운 인연들이다. 물론 지금 연락을 하진 않는다.
일요일에는 1차 격리가 끝나서 예비군훈련장을 떠나 사단으로 갔다. 버스를 타니 오랜만에 느껴지는 엔진 감이 참 상쾌했다. 군장에 내 모든 짐을 담고 의자와 짐 사이에 압축된 채 10분 정도 탄 느낌이 참 드라이브 같았다. 도착한 사단은 매우 컸다. 나쁘게 말하면 좀 낙후된 대학교 같았고, 좋게 말하면 갖출 건 나름 다 갖춘 그냥 군시설 같았다. 이제 3주다. 아니, 2주 하고 5일만 버티면 탈출이다.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새 생활관으로 갔다. 우리 생활관에 나이가 많은 형들이 생양아치였다. 그 형들을 빼고도 다른 애들도 딱히 인성적으로 평범하지 아니했다. 난 훈련의 강도나 생활의 불편함보다 그런 사람들과 한 달을 부대끼는 게 꽤 고통스러웠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생활관은 행정만 바로 앞에 위치한 생활관으로 정해졌고, 전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안 하진 않고 눈치 보면서 했다. 난 그렇게 그들이 떠들 때는 귀마개를 하고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박완서 산문집을 읽어 전혀 관심 없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누군가 들어와 얼차려를 주지 않을까 겁났다. 그런 일은 두 번밖에 없었지만.
11일~15일
갑자기 한 주를 몽땅 쓰는 것은 절대 귀찮아서가 아니라 이 주는 시간이 아주 빨리 갔기 때문이다. 각개전투 훈련을 했는데 아스팔트에서 구르니까 멍도 들고 아팠지만 시간이 빨리 가서 좋았다. 진짜 그거 하나면 됐다. 대간한 것이 잠도 잘 왔다. 물론 불침번은 힘들었다. 우리 방은 16명이나 됐고 (생활관을 옮기면서 2명이 더 왔다.) 하루하고 이틀 쉬는 패턴이 계속 이어졌다. 8시간 30분이나 되는 긴 수면 시간. 하지만 1시간 50분은 내 시간이 아니었다.
불침번 얘기를 좀 더 하자면, 2번째->4번째->6번째로 돌아갔다. 하루에 6명이 서는데, 홀수 군번은 홀수번째로 서고, 난 짝수에 섰다. 6번째는 1시간만 할뿐더러 중간에 잠을 깨지 않으니 가장 꿀이었고, 그다음은 처음부터 하는 1번째였다. 가장 화나는 건 5번째였는데, 다시 잠들려고 해 봤자 1시간 있다 깨야 해서 자는 것 같지도 않고, 날은 이미 밝아서는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때문에 다시 잠들기도 힘들다. 또 암구호라는 게 있는데 조교가 순찰하다가 암구호를 선창 하면 그에 맞는 후창을 해야 한다. 암구호는 분야를 막론하고 매우 다양했다. 기억나는 건 없다. 조교가 선창 하는 거에 답을 못하면 벌을 준다 했는데, 정작 조교들이 다 졸아서 그런 일은 한 번도 겪지 않았다.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나도 한번 안에서 잤다가 40분 있다가 깨서 안 들킨 적이 있다.
이맘때쯤 이태원에서 코로나가 터졌다. 그것 때문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모두 음성 판정이 나왔고, 중대 내에서도 확진자는 없었다. 그리고 월요일에 처음으로 전화를 하게 해 줬다. 엄마와 전화하면서 눈물이 많이 났다. 4번째 전화까지 울었던 것 같다. 근데 우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매우 뻘쭘했다. 수류탄 훈련과 구급법도 배우고 한 주가 지났다.
16일~17일
주말이었다. 옆 생활관에서 한 명이 휴대폰을 안 낸 것이 들켜 퇴소당했다. 샤워를 하다가 담배를 피운 한 명도 퇴소를 당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주말이라고 낮잠 시간을 주는 것은 물론 TV도 보게 해 줬다. 미친 듯이 야구가 보고 싶었지만 조용히 다수에 의견에 따라 예능프로나 여자 아이돌들이 나오는 음악방송을 봤지만 별 재미가 없었다. 2살 동생과 친해져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아주 뜬금없이 이 날은 노래방이 가고 싶었다. 다 익어가는 5월의 봄처럼. 나도 이곳에 적응해감을 느꼈다.
18일~20일
격리가 끝났고, 밥을 먹을 때 마주 보고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3일은 전투 훈련을 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애초에 이곳에서 배운 대부분의 군사적 지식을 전부 까먹었다. 난 군인 체질이 아닌가 보다. 심폐소생술만 잘 배워둬서 그건 좀 기억난다. 이때쯤 가지고 온 책을 다 읽어서 도서관에서 잡히는 대로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정말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을 인사처럼 하며 29일 만을 기다렸다.
21일~22일
분명히 한 달 동안 쓴 일기는 공책으로 두 권 분량이 나왔는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가 보다. 한 달 지났다고 가지 않을 것 같던 그 시간들이 잘 기억나지 않다니, 그때의 흔적들을 모두 지워서 그런 것일까. 이 글도 브런치에 올리려고 했는데 그럴만한 글은 아닌 것 같아 어느 시점부터 편하게 썼다. 22일에 행군을 했는데, 부식으로 이것저것 많이 나와서 배불렀다. 완전 군장에 12km였고, 내가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가고 있다는 최면을 걸면서 버텼던 것 같다. 그리고 산책을 너무 하고 싶었는데 걸으면서 부대 이곳저곳도 보고 군견이랑 청설모도 봐서 행복했다.
23일
주말이고, 거의 하루 종일 TV를 보게 해 줬다. 모두가 돌아가면서 전화도 했고, PX를 가게 해줬다. PX는 시골 구멍가게 같은 느낌이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상병 계급을 달고 있는 PX 병이 물건을 팔았고, 아주 불친절했다. 난 이곳에서 받는 모든 냉대를 저들이 현역이라는 이유로 포용했다. 사실 그거면 정말 된 거니까. 지나가는 다른 중대의 현역병을 놀리는 사람들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560시간 남고, 그들은 560일 남은 것이 참 가엾었다. PX에서 엄마한테 줄 달팽이 크림을 샀다. 다른 애들은 군것질에 많이 굶주렸는지 아주 과도하게 샀다. 과자를 7개 사는 친구도 있었다. 물론 30분 안에 먹지 못하면 다 버려야 했고, 그곳은 예수님과 12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하는 풍경을 방불케 하는 나눔의 장이 되어버렸다. 난 아이스크림 한 개와 초코바로 만족했다. 그렇잖아도 다른 애들이 많이 나눠줬다. 밖에서는 2000원 정도 하는 물건이 여기서는 410원에 파는 것이 기분 좋았다.
24일
종교활동을 했다. 난 종교는 없지만 불교가 가지는 이미지가 더 마음에 들어서 불교로 선택했다. 뻔하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신 스님은 입이 거칠어서 중간중간에 욕을 섞었다. 부처님이 들으셔도 허허하실 것 같은 느낌과 지나가는 사람이 들으면 스님이 아니더라도 어쩜 저리 상스러운 욕을! 하는 생각을 동시에 주는 그 아슬아슬함은 경건하면서 저급했다. 물론 재밌었다. 빵과 음료수를 주었고 만족했다. 근데 기독교를 간 애들은 햄버거를 먹었대서 좀 부러웠다.
25일~26일
코로나 때문에 2주 차에 예정돼있던 사격훈련을 했다. 총기 훈련을 빡세게 받았는데, 위험하니까 더 집중해서 들었다. 옆에 조교가 잘 도와줘서 잘 쐈던 기억이 난다. 총기 분해하고 조립하는 건 조금 까먹었어도, 내가 3조 4사로였던 것은 기억날 정도다. 난 20발 중에 11발을 맞췄는데 12발이 합격이라 떨어졌다. 내가 영점에서 오른쪽으로 좀 치우쳤다고 조교가 왼쪽으로 맞춰줬는데 그래도 오른쪽으로 총을 맞춰서 서로 머쓱했다. 그리고 사격장에 지네가 아주 많았다. 사람 33% 총 33% 지네 12324%였다. 선한 인상과 부드러운 말투를 가지신 2 소대장님이 잔인하게 지네를 짓밟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27일
행군에서 어떤 훈련병이 다른 훈련병에게 패드립을 쳤던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그 수위는 아주 더럽고 입에 담기도 싫은 수준이어서, 양아치들이던 우리 생활관 형들도 심하다고 할 정도였다. 당연히 그 훈련병은 퇴소당했다.
훈련병의 날이랍시고 장기자랑을 시켜줬는데 아주 부실했다. 노래 신청한 사람들이 8팀 정도 됐는데 3팀만 노래를 부르고, 상품을 준다 했다가 말을 바꾸는 등 매우 군대다운 일처리였다.
28일
대청소를 했다. 우리 생활관 나이 많은 형들의 삽질로 인해 화장실을 배정받았다. 이제 내일이면 가는 것이 올 때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내일. 24시간 후면 난 사회에 있는다. 기대가 되고 떨렸다. 여기서도 이제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짐도 다 싸고, 반납할 보급품들을 반납했다.
29일
마지막 날이다. 휴대폰을 받자 느낌이 너무 새로웠다. 외계 문명의 물건을 받은 기분이었다. 감촉도, 빛도 낯설었다. 멋있는 군악대의 연주를 받고 수료식을 진행했다. 햇볕에서 20번 정도 연습한 수료식이었다. 사단장은 그런 것을 알까. 그런 생각을 하며 부동자세로 운동장에 서 있었다. 독후감을 잘 써서 상을 받았다. 사단장과 악수도 했다. 이제 모든 짐을 받고 차례대로 버스에 올랐다. 드디어 집에 가는 것이다. 주변에 산과 논과 밭 대신 점점 도시적인 건물들이 보였다. 버스에서 동기들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어느 하나 웃음을 띠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도베르만을 닮으신 1 소대장님이 함박 같은 미소로 우리를 배웅하셨다. 고생했다는 말이 5월 말 볕보다 더 따스했다. 저 멀리 사람들이 운집해있는 곳이 보였다. 앞자리에 탄 덕에 거의 맨 먼저 내렸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부모님이 보였다. 그 날, 군복 소매가 많이도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