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 Dec 12. 2024

탄핵 집회장을 가득 채운 젊은 여성들, 자랑스럽다

윤석열 탄핵 집회장에서

   

지난 7일, 윤석열 탄핵 집회장에서, 나는 좀 의아했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집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주체가 내 딸애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탄핵 집회 때에도 젊은 여성들이 많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놀라웠다.      


계엄이 번져 시국이 위태로워지면 ‘페니X들을 찾아 죽이고 성폭행하자’는 남초 커뮤니티의 무참한 댓글 테러를 가볍게 쓰레기통에 처박아 진압하고, 명백히 존재하는 성차별이나 여성 혐오가 없다고 우기는 가부장의 위선과 읍박지름을 지긋이 즈려밟고서, 용감히 광장으로 뛰어나와 탄핵을 외치는 이들의 기개에 나는 압도당했다. 윤석열을 체포하고 탄핵하라는 나의 구호는 이들의 기를 받아 더 크고 높게 뻗어 나갔다. 이 우뚝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들과 여자들이 어찌 가슴 벅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이 나만의 상황적 사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해서 다음날 집회에 참석한 친구나 지인들을 수소문해 그들이 목격한 탄핵 집회의 주체들을 물어보았다. 대답과 함께 보내온 사진에는 내가 본 여자들의 광장이 나만의 상황이 아니었음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이들이 미래의 희망이라는 답글도 있었다.      


사실 이들에게 미래의 희망이라고 말하기는 여간 미안한 게 아니다. 싸가지없는 젊은 X들이 재미만 보고 애는 안 낳으려 한다는 입으로 전할 수도 없는 저출산 혐오에, 비정규직 노동 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젊은 여성들에 대한 저임금 노동 착취와 성차별만 보더라도, 어떻게 이들에게 희망 운운할 수 있겠는가. 누가 미래의 희망을 이렇게 취급한단 말인가.      



나는 내 앞과 옆과 뒤를 가득 채우고 있는 여성들이 들고 있는 가지가지의 응원봉을 살펴보느라 간간이 구호 타이밍을 놓쳤다. 아 저런 걸 들고 ‘덕질’을 하는구나. 그나저나 천하의 악당 반란수괴 윤석열을 처벌하라는 탄핵 집회장에 저 블링 블링한 응원봉을 들고나오다니, 기막힌 전유가 아닌가. 이들은 탄핵 광장을 마치 대규모 놀이광장으로 전유해, 악당을 이기는 것은 더 큰 증오가 아니라 모두의 조롱거리로 낙후시키는 유희임을 선취해 매우 고차원의 전략으로 집회에 임하고 있었다. 엠지의 센스는 확실히 달랐다.     


물론 가족끼리 온 집회 주체들도 많았다는 전언도 있었다. 그랬을 것이다. 나는 지하철역에서 국회 쪽으로 나가보지도 못하고 여의나루로 우회한 터라 집결한 집회장마다 주체들의 층위가 다를 수 있음을 안다. 여튼 내가 속한 집회장 쪽은 분명 압도적으로 많은 젊은 여성들의 분노와 열기가 충만했음을 증언한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이러한 진풍경이 긴박한 탄핵 속보의 홍수 속에서도 속속 보도되고 있었다. 앳된 소녀들이 응원봉을 들고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방송사 인터뷰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진기한 광경 말이다. 이런 ‘영 우먼 파워 웨이브’의 화룡점정은 정말 뜻밖의 지역에서 극적인 한 점을 찍었다.     

 

‘TK’로 불리는 대구를 위시한 경북지역의 젊은 여성들이 도저한 탄핵 집회의 물결을 타고 강력한 정치적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이 지경에도 정신을 못 차리는 윤석열과 국민의 힘 국회의원들과 이들의 잔당들에게 거센 항의의 짱돌을 움켜쥐고 일어선 것이다. ‘TK의 콘크리트는 딸들에 의해 부서질 것이다. 몇 년이 걸려도 반드시 부서질 것이다’ 와우, 대단한 기세다.     



잠깐 생각을 가다듬으며 나는 ‘진귀한’ 장면이라 표현한 나의 어리석음을 자아비판하겠다. 젊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은 진귀하지 않다. 역사 속에 늘 존재했다. 역사의 조명이 그들을 비추지 않았을 뿐이다.   

   

3.1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소녀들은 비밀 파발을 돌리고 태극기를 만들어 뿌렸고, 3.1 만세 광장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전투와 작전에 목숨을 걸고 참가해 공과를 올린 이름 불리지 못한 여성들은 얼마인가.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된 횃불을 밝힌 여자들의 역동이 있었고, 6,70년대 가열차게 싸운 노동쟁의의 현장에 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계엄군이 짓밟는 광주에서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나와 주십시오’라고 외친 젊은 여성과 광장에 스크럼을 짜고 누운 여고생과 공장 여공들과 성매매 여성들, 그리고 시민군의 밥을 해 나르던 여성들이 언제나 혁명의 광장에 있었다. 그들은 늘 당당한 정치적 주체였다. 역사의 계보를 잇는 젊은 여성들이 광장에 출현한 것은 전혀 기이한 현상이 아니다. 이를 자각하고 다시는 ‘탈정치화된 여성’이라 비하하는 언설이 설 곳은 없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