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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리 Jul 24. 2020

아이낳을 자유를 허하라(2)

아이는 나로 하여금 세상을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친정에 볼일이 있어 급히 시외버스에 애 안고 유모차 접어가며 낑낑대며 올라탔는데 애는 이유없이 계속 울어댄다. 이리도 해보고 저리도 해봐도 애는 울음을 안그치고 "애 있는 사람이 왜 버스를 타? 왜 밖을 나와?"하는 승객들 짜증스런 눈초리가 등에 꽂힌다. 급기야 버스기사가 버스를 세우고 내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오기까지 한다. "애가 왜 이렇게 울어요? 어휴.. 이거라도 좀 먹여보세요!" 짜증내며 던지다시피 주고가는 초콜렛. 나는 죄인이 되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읊조린다. 근데 저기, 제 아기는 채 이빨도 안난 5개월 아기인데요.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고 있는데 애가 자꾸 엄마 엄마 칭얼거리면 "애 있는 사람이 왜 카페를 와?"하는 손님들 따가운 눈초리가 등에 꽂힌다. 식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줌마! 애를 왜 데리고 나와요? 그리고 애가 울면 어떻게든 좀 하세요! 다른 사람한테 피해 좀 주지 말고!"


사회 소수자가 되어 사회에서 격리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절히 느낀다. 그래서 왠만하면 집에 있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독박육아를 하게 되었다. 정 답답하면 우리가 가도 되는 몇 안되는 놀이터나 키즈카페 따위를 다닐 뿐이다. 사회에서 격리 당하고 보니 예전에 내가 얼마나 무심하게 살았는지 반성이 된다. '에이 설마, 뭐 그 정도에요?' 하는 사람들은 운좋게 사회 주류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다. 이건 경험해 보기 전에는 절대 공감할 수 없을 거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친정엄마가 다시 보였다. 애 낳기 전에는 몰랐다. 우리 엄마는 왜 항상 짜증내고, 피곤해하고, 불평이 많고, 잠시 못 앉아있고 항상 종종거리는지... 애를 낳고나니 엄마가 측은해졌다. 엄마 뼈와 살을 갈아서 아빠와 딸 둘 뒷바라지를 했다. 물론, 아빠도 직장생활 버티며 처자식 먹여 살리는 거 안 힘들었다는 거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술을 마셨을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은 나의 수고를 잊지 않는다. 매달 월급을 주고, 월급이 꼬박꼬박 올라가고, 직책도 올라가고, (앞에서는) 나를 따르는 직원들도 있다. 직장과는 달리 육아와 집안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고마워하지도 않고, 성과가 바로 나타나지도 않고, 쉬는 날도 없고... 내가 아줌마가 되고보니 그 젊은 시절 우리 엄마가 측은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친정에 가면 내가 화장실 청소를 하곤 한다. 엄마한테 해줄게 없어서 그거라도 한다.


애 뒷바라지도 힘겹고, 사회에서 격리되는 것도 서럽지만, 그래도 이 모든 걸 상쇄할만큼 좋은 점 두 가지가 있다. 나날이 커가는 생명을 바로 곁에서 두고 지켜보고, 보살핀다는게 얼마나 큰 행복을 선사하는지 아는가? 첫째가 태어났을때 아기를 지긋이 바라보던 우리 엄마, 아빠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렇게 넋놓고 좋아하시는건 처음 봤다. 내가 이제까지 어떤 학문적 성취, 직업적 성취를 이루었을 때도 그 정도로 좋아하시지는 않았는데... 


우리는 일개 장미꽃 만발한 것만 봐도 감탄하곤 하는데, 하물며 사람꽃은 어떠하랴. 우리 첫째는 꽃봉우리 같고, 둘째는 새싹 같다. 첫째와 둘째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얼굴도 보이고, 남편 얼굴도 보이고, 시어머니 얼굴도 보이고, 친정 엄마아빠 얼굴도 보인다. 참으로 오묘하다. 내 예전 사진을 보고 있으면 지금 얼굴하고 비교되서 속상한데, 첫째 얼굴에 얼핏 내 젊은 시절 모습이 스친다. 나는 늙어갈지언정, 우리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시간이 지나는게 야속하지만은 않다. 아이들이 주는 활기가 있다. 아이들이 있어서 사는 이유가 생겼다. 아이들을 위해서 더 열심히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건강을 챙기고, 돈을 벌고, 부지런히 나들이를 간다.


아이는 나에게 아낌없고, 꾸밈없는 순수한 사랑을 무한정 준다. 우리는 흔히들 부모가 희생해서 키우고,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키워보니 그 반대다. 아이가 나한테 사랑을 준다. 그것도 감당할 수 없을만큼 너무 많이 준다. 직장 갈때 어린이집에 떼어놓고 가면 아기는 세상을 잃은 것처럼 엄마 엄마 꺼이꺼이 울고, 직장에 다녀와서 집에 들어서면 아기는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며 있는힘껏 빨리 기어 와서 나를 안아준다. 나한테 엄마 엄마 말걸어주고, 시도때도 없이 뽀뽀해주고, 나를 닮았다며 공주 그림을 그려서 선물해준다. 도대체 내가 어디서, 누구에게 이런 계산없이 순수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세상 어디에 누가 나를 이토록 간절히 필요로 한단 말인가? 아기가 오기 전에 내 삶은 흑백처럼 단순했고, 그제가 어제같고, 어제가 오늘 같았던 지루한 나날이었는데, 이렇게 아기와 함께 총천연색 세상이 나에게 왔다.


아이가 너무 예뻐서 남편하고 농담삼아 셋째 이야기를 한다. 셋째를 가졌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잡아 먹을지도 모른다. 특히 직장 상사들은 또 얼마나 나를 몰아 세울 것인가. 일일이 날을 세우고 싶지는 않다. 각기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한가지만 부탁하고 싶다. 아이 안낳을 자유도 있지만, 아이 낳을 자유도 있다. 아이 안 낳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아이 낳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너희의 아이없음이 노력해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아이있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그러니 아이 낳을 자유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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