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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리 Jan 19. 2024

할 짓이 없어서 요리를 하나

집밥은 죄가 없다

프랑스 오고나서부터 5인분 분량의 3식(집밥 세끼를 먹는다는 뜻)을 1년반째 하고 있다.


사먹을 것이 마땅히 없으니 집에서 해대는 수밖에 없다. 여기 사람들은 바게뜨, 크라상, 초코빵, 샌드위치, 쿠키, 케이크 따위를 식사로 먹는다. 샌드위치라고 해봤자 한국처럼 정성스럽지도 않고, 야채도 아예 안 들어간다. 여기 사람들이 자주 먹는 햄버터 샌드위치('잠봉버어'라고 부른다)라고 있는데, 그야말로 딱 햄 한 장과 버터만 들어간다. 그게 식사가 되나? 그 딱딱한 걸 먹다보면 목이 메이는데 주스나 콜라 한캔으로 꾸역꾸역 넘긴다. 그래도 입맛 없는 여름에는 그렇다쳐도 비도 추적추적 오는 매서운 겨울 날씨에 그렇게 먹다가는 서러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래서 죽으나사나 집에서 밥을 한다. 볶음밥, 국밥, 김밥, 비빔밥 다양하게 한다. 그렇다고 밥만 하는 건 아니다. 한국식 샌드위치나 토스트도 하고, 국수도 하고, 파스타도 하고, 스파게티도 하고, 전도 부치고, 튀김도 하고, 김치도 하고, 샐러드도 하고, 계절에 맞게, 물리지 않게 돌려가며 한다. 1년반 넘게 하고 있자니, 급식소를 제대로 운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 사람들의 반응이다. 우리 집에 왔다가 앞치마를 두르고, 머릿수건을 쓰고, 열정적으로 밥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당혹스러워 한다. "또 요리를 하고 앉았냐?", "할 짓이 없어서 요리를 하고 앉았냐?"고 말한다. 나는 처음에 내가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내가 괜한 자격지심인가 싶었는데, 진심이었다. 프랑스는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우는 여자들을 우습게 본다. 우습게 보는 수준이 아니다. "할 짓이 없어서 그러고 앉았냐, 당장 나가 일해!"라는 눈초리다.


프랑스는 페미니즘(여성해방운동)이 우리나라보다 한 세대 앞서 있다. 우리 시어머니(60년생)세대에 이미 극단적인 페미니즘이 시작되었다. 68혁명에서 '금지를 금지하라'는 구호 아래 결혼제도는 빛을 잃었고, 태어난 아이들 중에 60%가 혼외자(미혼모 자녀)였다. 우리 남편도 그 60% 안에 들어서 아버지 얼굴도 못보고 자랐고, 엄마와 외할머니 손에서만 자랐다.


그렇게 자란 우리 남편이 어쩌다 한국여자와 연애를 하게 됐고, 우리 친정부모님한테 인사를 드리는 순간 엄청난 안정감을 느꼈다고 했다. 부부가 결혼을 하고, 중간에 헤어지지 않고 평생을 같이 해로하며, 의붓자식 없이 한 핏줄 형제끼리 한 집에서 지내는 모습이 더없이 좋아보였다고 했다. 멀리서 왔다고 된장찌개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 불고기에 김치, 야채쌈까지 부산하게 한 상 차리고 있는데 우리 남편은 너무 감동해서 어쩔줄 몰라 했다.  


나는 그때는 몰랐다. 무엇 때문에 우리 남편이 그토록 감동을 받는지 몰랐다. 프랑스에 와보니 알겠다. 우리 시어머니는 일년에 한두번 명절이나 생일 때나 스테이크를 굽거나 하지, 평소에는 병조림이나 통조림을 따서 전자렌지에 데워먹는 수준이다. 우리 시어머니 뿐만이 아니라 다들 그러하다. 여기 사람들 마트에서 장보는걸 보면 죄다 냉동식품, 병조림, 통조림, 가공식품 뿐이다. 오븐이나 전자렌지에 바로 데울 수 있는 냉동피자, 냉동감자튀김, 냉동고기파이 같은 것들, 야채도 잘라서 냉동된 걸 먹고, 과일도 바로 먹기 좋게 되어있는 병조림, 통조림을 먹는다. 우유는 멸균우유만 판다. 빵도 유통기한이 한두달 된다. 한국 마트 빵은 유통기한이 일주일밖에 안되는데... 여기는 한번 장보면 몇주씩, 몇달씩 쟁여놓을 수 있다.


특히 프랑스에 정말 신기한 picard라는 마트가 있는데, 오로지 냉동식품만 판다. 커다란 마트에 냉동고만 수십개가 있다. 사람들은 산타할아버지가 들고다니는 선물주머니만한 커다란 아이스팩을 들고 와서 쓸어 담아간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나도 몇번 가봤는데, 정말 놀란 것은 가격이 신선제품보다 더 비싸다는 것! 냉동 닭고기가 정육점에 파는 냉장 닭고기보다 더 비싸다. 먹어보니 품질이 좋은 것도 아니다. 냉동이 냉장보다 안 좋다는 건 당연한데 어떻게 가격이 더 비싼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프리미엄이라고 광고는 엄청 해 놨는데 아무래도 이해가 안된다.


이렇듯 여기 프랑스 사람들은 거의 냉동식품과 가공식품만 먹으며 지낸다. 그래서 내가 볶음밥만 해줘도 감동을 해서 쓰러질려고 한다. 이게 뭐라고. 집밥에서 여성을 해방시킨다고 집밥을 없애버리고 간편식만 먹는게 페미니즘일까. 집밥은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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