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를 만난다니, 살면서 그런 생각을 따로 해본 기억이 없다. 따로 새를 보러 가지 않아도 눈만 돌려도 주변에 늘 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아는 것처럼 나 역시 까치, 까마귀, 참새, 백로, 독수리 정도의 새 이름밖에 몰랐지만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물론 가끔 눈앞에서 나는 새 이름이 궁금한 적도 있었으나 그건 새를 보았을 때만이고 그때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기는 꽃과 식물을 공부하거나 나비를 처음 시작할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내가 식물을 보러 다닌다거나 나비나 새를 보기 위해 나와 있다고 하면 대부분의 반응은 “세월 좋구먼”였다. 물론 여행작가라는 직업도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이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니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난다는 의미도 있지만 또 다른 속내는 한심스럽다는 의미도 깔려 있다. 물론 나는 악의 없이 받아들이곤 한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처음이 어렵지, 막상 시작하고 나면 어느 순간 그 세계에 푹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마음속으로만 꿈꾸거나 동경만 하다가 마는 경우가 많다. 내가 다른 이와 차이가 있다면 행동으로 옮긴다는 사실이다. 처음 해외여행을 시작했던 1991년에는 아직 해외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은 시기라서 혼자 나간다는 자체가 실감 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낯선 동네에서 한 달 반을 지내고 나니 슬슬 자신감이 붙었다. 돌아보면 내 진정한 여행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그냥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제법 있다. 한때는 괜히 시작했다고 후회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늦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험은 내게 선한 영향을 미쳤다. 자연에 푹 빠졌다고 해서 후회할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글을 쓰는 나로서는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자연과 만나면서 내 삶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렇게라도 시작한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꽃다지에서 활동하는 박형근 선생이 새를 보러 다닌다고 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아내가 새에 관심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로만 생각했다. 만약 그때 새를 보러 가자고 권유했더라면 나는 어떤 핑계라도 들어 거절했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제 막 시작한 식물 공부에 나비까지 더해지다 보니 시간도 그렇지만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새까지 보러 간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막판에 나비 도감을 만들 때도 왜 나비를 공부한다고 했을까 하는 후회가 잠시 들기도 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늦가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매주 토요일마다 다니던 나비생태학교가 9월부터 격월제로 바뀌기 시작했고, 11월 무렵에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었기 때문이다. 식물 역시 늦가을부터는 볼 수 있는 식물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일이 별로 없었다. 그동안 나비와 식물에 푹 빠져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시간 공백이 생기니 세상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새를 보러 간다는 박형근 선생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이때 내 관심을 새 쪽으로 쏠리게 하는 결정적인 일이 발생했다. 바로 철원으로 재두루미를 보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도 식물 탐사를 다닐 무렵이면 강원도 철원에 한 번은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거의 매번 들었다. 같이 다니던 우리 일행은 당연히 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결국 재두루미가 오는 12월에 가기로 했다. 그 무렵 강원도 날씨는 살인적이었다. 영하 20도를 넘나들고 있었다. 남쪽 지방에 살아서인지 그런 온도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어차피 가야 할 날은 잡혔고, 강원도 추위는 그러려니 하는 게 마음의 위안이 될 뿐이었다. 이번 탐조여행에서 민통선 안까지 들어간다는 이야기까지 들리자 마음 한편으로는 살짝 긴장이 되기도 했다. 금단의 땅으로 발을 들여놓는 셈이니 말이다.
먼 길이니만큼 우리는 새벽에 만나서 출발하기로 했다. 마음먹기는 했으나 역시 철원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중간에 쉬고 간다고 해도 다섯 시간을 훌쩍 넘는 거리이다. 우리가 묵기로 한 곳은 철원군에서 운영하는 <DMZ 생태평화공원 방문자센터>였다. 숙소는 쾌적했고 근무하시는 분들도 친절하고 유쾌했다. 더 다행인 점은 우리 숙소가 재두루미를 관찰할 수 있는 곳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재두루미를 보러 가기로 했다.
막상 재두루미를 본다고 하고 나왔건만 초보인 나로서는 막연하기만 했다. 상상으로는 재두루미가 하늘을 훨훨 나는 모습을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그 유명한 재두루미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해서 차 양쪽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을 때였다. 길옆 논바닥에 재두루미 가족이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차를 세우고 창 너머로 펼쳐져 있는 한 폭의 그림을 보았다.
보통 재두루미는 부모 새와 어린 새가 함께 다닌다고 했다. 다 큰 새는 성조라고 하고 어린 새는 유조라고 한다. 유조는 부모 새와 달리 색깔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초보라 할지라도 조금만 유심히 보면 구별할 수 있다. 부모가 앞뒤에서 자식을 보호하는 모양이었다. 사람이나 새나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부모가 희생을 감수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추수가 끝난 논이 그들에게는 휴식처이자 먹이를 보충할 식량자원인 셈이었다. 그렇게 재두루미 가족을 보니 드디어 우리가 강원도 철원 땅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어 목적지인 <철새 평화타운>에 도착하니 새를 관찰할 수 있는 탐조대가 나왔다. 재두루미의 안전을 위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새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우리 눈앞에 있는 재두루미는 천여 마리. 말이 그렇지 천여 마리에 달하는 새를 눈앞에서 본 적도 없거니와 게다가 천연기념물이라니 더더욱 놀라웠다(재두루미는 천연기념물 제203호이다). 처음 생각했던 막연하게 새를 보러 간다는 생각은 그 순간 다 사라져 버렸다. 아, 이런 맛에 새를 보러 다니는구나, 이쯤이면 앞으로 새를 보러 가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 저 밑바닥에서부터 피어올랐다.
그날 우리는 몇 시간 동안 막사에서 재두루미와 겨울 철새 사진을 정신없이 찍었다. 평화타운 조망대는 임시로 만든 시설이어서 그런지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예전에는 허허벌판에서 탐조를 했다는 말을 들으니 아찔했다. 아무리 새가 좋아도 이 엄동설한에 야외에서 몇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하기는 설산을 오르거나 얼음낚시하는 이도 있는데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이 정도 추위쯤이야 엄살 부릴 일도 아닐 것이다.
단단히 챙겨 입었다고 했으나 철원의 영하 20도 추위는 역시 매서웠다. 매섭게 파고드는 한기는 우리가 강원도에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대개 탐조는 한 자리에 앉아서 새를 기다린다. 새들이 예민하기 때문에 다가가거나 움직이는 기척만 들려도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다. 낚시도 그렇지만 만약 새를 즐겨 보지 않는 이라면 남들이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즐거워하는 시간도 지루하기 짝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눈앞에서 이름만 들었던 재두루미의 군무를 보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간혹 새들이 몇 마리씩 날거나 한가로이 먹이를 먹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군에서 새들에게 주기적으로 먹이를 준다는 이야기였다. 하기야 그렇지 않다면 저 많은 새가 낙곡만으로 배를 채울 수 있겠는가. 재두루미는 한 방향으로 계속 날아가지 않고 몇 차례나 우리 주변을 선회하며 날아갔다. 상승 기류를 타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눈앞의 산수화는 매번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왜 새를 보기 위해 철원에 가야만 하는지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평화롭게 먹이를 먹던 두루미들은 삵이 출현하거나 위협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고개를 쫑긋 세웠다가 어느 순간에 한두 마리가 날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이는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행동이었겠으나 탐조를 나선 이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황홀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새가 날기를 기다리는 탐조인들의 기다림을 넘어선 새의 날갯짓이 교차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새의 세계에 입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