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들 Aug 18. 2022

<곤충의 밥상> 현장 탐사

어느 해인들 곤충이 편한 날이 있었으랴마는 유독 올해는 곤충이 시련을 겪는 고통의 시기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폭염, 폭설, 태풍, 지진 등 곤충이 살아남기에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다. 올해만 해도 그렇다. 봄에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가뭄으로 전 국토가 깊은 시름에 잠겼다. 모내기가 절실한 농부부터 과수농사를 하는 이,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식수까지 위협받는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봄이 지나니 사상 최악의 폭염이 들이닥쳤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유럽은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농작물이 말라 죽고 생활용수가 바닥을 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은 이 땅에 사는 식물과 곤충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식물의 개화시기가 늦어지거나 곤충의 발생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곤충이 줄어들면 그 종만의 문제가 아니다. 곤충은 새나 거미의 먹잇감이다. 이렇듯 수가 줄어들면 새나 곤충의 상위 포식자들은 당연히 영향을 받게 된다. 자연 생태계의 한 축이 무너지면 전체가 송두리째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의 꿀벌들이 70억 마리, 대략 80% 정도 사라지자 당장 과수원과 채소를 가꾸는 농사꾼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만약 이런 현상이 몇 년만 지속된다면 우리 생태계와 인류의 삶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첫인상이나 한 마디로 사람을 단언하는 일만큼 무모한 일이 없다. 내가 몇 차례 만났던 정부희 선생은 열정적인 사람이다. 물론 학문을 하기로 했으니 논문을 써야 했을 테고 논문을 쓰기 위한 기초 자료와 다양한 표본, 그리고 통계를 내기 위해 필요한 적정한 수치의 개체가 필요했을 것이다. 문제는 답이 도서관이 아니라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자니 남들이 찾지 않는 오지를 얼마나 걸었을 것이며 불면의 밤을 보냈을 것인가?     


한국에서 철학 다음으로 안 팔리는 책이 곤충 관련 책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에게 곤충의 미지의 영역이다. 정 선생이 곤충을 시작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 길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 길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일찍이 나비박사로 유명했던 석주명 선생은 논문을 쓰기 위해 수십만 마리의 나비 날개를 자로 쟀다는 일화를 남긴 적이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처음 선생이 곤충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도 흥미롭다 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했던 선생은 여러 곳으로 문화재 답사를 다녔다 한다. 그러다가 보니 폐사지나 버려진 석탑 등에 피어있던 야생화에 흠뻑 빠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심히 보았던 야생화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벌레가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시작한 곤충에 대한 열정은 배움으로 이어졌고, 선생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에겐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 무심히 흘려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때 탄생한 명언이 ‘그때 만일’이다. “그때 만일 내가 삼성전자의 주식을 샀더라면” “그때 만일 내가 강남에 땅을 사놓았라면” 류의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말들이 우리가 과거를 후회하면서 흔히 쓰는 상투적인 말이다. 거기에 “그때 만일 내가 시작했더라면”이 하나 더 붙는다. 아무튼 선생의 인생은 그렇게 해서 곤충으로 한걸음 더 나아갔고 결국 인생 역전 드라마까지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도 처음에는 몰랐을 것이다. 그때 만난 인연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을 줄은.      


대개의 사람들은 취미를 자기 삶의 소일거리나 무료한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이용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기롭게 시작을 했다가 싫증이 나면 접는 경우가 허다하다. 남들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비싼 골프채를 사서 연습장에 등록을 하거나 어느 날 몸짱이 되겠다고 헬스클럽에 덜컥 가입을 해서 1년짜리 상품을 끊는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결국 관심이 시들해지면 골프채에는 먼지가 쌓이고 헬스클럽 회원권은 집안 구석 어느 어디론가 뒹굴어 다닌다.      




하지만 정부희 선생은 달랐다. 곤충에 대해서 알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때늦은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전공을 바꿔서 공부를 하는 것에 부담이 크다. 게다가 문과 사람들이 이과로 전공을 완전히 바꿔서 공부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예를 들면 문과가 인문학을 기반으로 해서 인간의 삶과 삶의 질을 높이고 풍요로움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과는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성향이 강하다. 감성과 이성이 맞서는 셈이다. 둘이 병행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문과 사람들은 대부분 수학이나 통계를 내는 일 등에 약하다. 수포자들이 문과에 많은 이유는 도저히 수학과는 친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선생도 초기에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본인은 통계에 약하고, 이과 관련 논문은 통계를 필수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곤충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에 실행에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곤충과의 만남은 그를 산으로 들로 떠돌아다니게 만들었다. 해가 거듭되면서 아는 곤충이 많아졌고 관심사도 넓어지고 풍부해졌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의 파브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일가를 이룰 수 있었다.     



곁에서 보기에 그녀의 열정에는 한계가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다 보면 체력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의욕은 앞서지만 체력이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적당히 경계를 둔다. 강의를 오래 해 본 사람들은 안다. 젊었을 때는 3시간이나 4시간도 할 수 있다. 나 역시 한때 4시간 동안 연강을 했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그건 젊었을 때 이야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무리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정 정도 선을 넘어서면 그 이후 감당해야 할 몫이 상당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축적된 경험치는 사람들을 만날 때나 강의를 할 때거나 외부로 나설 때 몸을 사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 선생의 강의는 중간에 휴식을 강제해야 할 정도로 열정적이다. 쉬는 시간에 물어오는 질문도 당연히 선생의 몫이다.      


이쯤 되면 강의 한계선을 대전으로 정했던 그가 전주까지 내려온 연유가 궁금했다. 가장 첫 번째로 꼽은 이유는 사람이었다. 다른 지역도 그렇지만 전주 선생님들이 탐구에 대한 열정과 따뜻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다면 1년 내내 연구와 탐사, 그리고 강의가 잡혀 있는 그가 서울이나 근교가 아닌 이곳까지 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인연은 이어지고 소중한 관계는 쌓인다. 



작가의 이전글 정부희 <곤충의 밥상>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