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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Sep 23. 2023

빈 여백을 생각한다.


           

“결국에는 교정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거네요.”. 


10기 김미경 선생의 말이다. 그녀는 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라고 했을까? 교정을 하다 보면 자신이 판각한 내용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바둑으로 치면 복기와 다름없다. 그 길을 걸어가다 보면 과거의 자신과 만난다. 


어떤 글자는 마음이 급해서 서둘러 조각도를 재촉한 것이고, 어느 글자는 억지로 힘을 주다 보니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다. 이것저것 제외하다 보면 결국 전체 글자 중에 마음에 드는 글자는 몇 남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게 판각이다. 


물론 판각을 하는 내내 도를 닦는 수행의 마음으로 글자를 새길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는 적어도 자신을 다스리며 글자를 새겼어야 한다는 고뇌가 느껴졌다. 어찌 이와 같은 고민이 혼자만의 몫이었겠는가. 아마도 이 작업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판각을 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책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보니 그제야 보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조금 더 힘을 뺐더라면, 욕심을 부렸던 마음을 내려놓았더라면, 시간이 좀 더 충분했더라면과 같은 후회가 끊임없이 달라붙을 것이다. 사실 이런 후회는 판각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내내 시간을 되돌리고픈 그런 유혹에 빠진다. 



도공들이 마음에 드는 자기를 얻기 위해 수십, 수백의 도자기를 깨뜨리는 것도 비슷한 심정이리라. 서예를 하는 이들이 수십, 수백 장의 파지를 남기는 거나 작가가 원고지에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일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 과정에 서 있을 뿐이다. 굳이 판각이 아니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흔히 깨닫지 못한 것 중에 하나는 적어도 그때만큼은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다. 비록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가장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과까지 좋았더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어디 모든 게 우리 뜻대로만 되던가. 돌이켜 보니 그때 조금 더 최선을 다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남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후회가 없는 삶이 가당키나 하던가. 심지어는 자신이 간절히 원하던 물건을 얻고 난 다음에도 후회는 어김없이 남는다. 물건을 살 때만이 아니라 자신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영화를 보거나 콘서트를 갈 경우에도 완벽하게 만족하기란 쉽지가 않다. 어쩌면 그런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신의 기대치와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그 간극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마음은 사람들 입이 떡 벌어지게 멋지게 새기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인정해야 하는 일이 있다. 자신의 현상태를 인정하는 것도 그렇다. 


일을 마무리하는 게 일을 처음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법이다. 판각한 책판을 다시 책으로 엮는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판각 역시 마음은 잘 새기고 싶으나 조각도가 원하는 대로 가지 않을 수가 있고, 마지막 순간에 방심하여 망치는 일도 생긴다. 글자를 새기다 보면 칼날 하나도 제대로 갈지 못하면서 어떻게 판각을 하냐라는 자괴감도 괴롭힌다. 각수와 나무의 진정한 우정은 그런 방황 속에서 탄생한다. 우리는 그렇게 실수를 하면서 성장한다. 


처음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서툴기만 했던 일이 조금은 익숙해지고 어느새 편안해지는 것이다. 나무 앞에 서면 긴장하던 손이 조금은 힘이 덜 들어가고 느긋해지기도 한다. 급하게 서두를 일이 없으니 한결 여유롭다. 그 눈으로 다시 보니 자신이 작업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다. 어떤 때는 자신이 새긴 작품을 보며 대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나쁜 징조가 아니다. 자신의 실력이 조금 더 늘었다는 것이고, 이제는 그것을 감당할 만큼 실력이 좋아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다만 지금 그걸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는 매 순간 그렇게 최선을 다하며 산다. 허투루 산 삶이란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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