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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Sep 26. 2023

출사에 나서며


출사가 잔인한 것은 심혈을 기울여 찍은 수백 장 사진에서 건질 게 별로 없을 때이다. 한 장씩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을 지우다 보면 나중에는 남는 게 없을 때 나는 절망한다. 모델이 나름대로 자신 있는 포즈를 취하며 수많은 기회를 주었건만 그걸 놓치고 무심히 날려 보낸 나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아마 충분히 잘 찍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실 이런 경우는 흔히 있으며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출사가 감사한 것은 수백 장의 사진 가운데 마음에 드는 사진을 만날 때이다. 이런 사진을 만나면 심장이 난리가 난다. 한 장씩 사진을 지우다가도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오면 그것만큼 고마운 게 없다. 모델이 부여한 기회의 끈을 잡고 한 순간이라도 그와 충분한 교감을 했다는 느낌이 드는 사진이 나오면 그날 출사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가 자연과 교감하며 빚어내는 짧은 시간을 포착함으로써 출사는 가장 찬란하며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으로 바뀐다.



빌트록스에서 진행한 선유도 공원 기획 행사는 끝났다. 인사를 나누고 사은품을 받아 든 사람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다행히 오늘은 일정이 비어 있다. 사람이 빠져나간 공원에는 허전함만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진에 대한 열정이 지나친 사람들이 북적대며 셔터를 누르는 공간이었는데 그들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황화코스모스뿐이다.


나는 아쉬움이 남아 조금 더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선유도 공원에 머물렀다. 보석같이 반짝이던 자작나무들이 해가 바뀌자 한풀 숨이 죽었다. 조금 전까지 단미씨가 거닐던 자리에는 그늘이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찬란한 햇살을 머금고 있던 세상이 이제 석양으로 물들어갈 시간이다.



방금 전까지 눈부시게 빛나던 자작나무는 같은 자작나무가 아니었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평범한 것들이 소중하다는 걸 잊고 산다. 저녁 어스름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공원에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처럼만에 찾아온 주말의 편안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공원 곳곳에 앉아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만큼은 급할 것도 없고 마음 쓸 일은 더더욱 없을 터였다.



우리가 세상을 기억하는 방식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중에 사진은 침묵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매혹적인 장르이다. 출사를 마친 후, 선유도 공원에서 나와 버스를 타는 데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햇살은 반짝이고 사람들도 행복해 보였지만 사진 출사 때 그 빛나던 순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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