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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Feb 13. 2024

절망에서 건져 올린 희망의 노래

여행을 하다가 스페인에서 몬세라트 산 근처에 있는 포도밭으로 와이너리 투어를 한 적이 있다.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포도 산지로는 프랑스 보르도,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꼽힌다. 그러나 면적으로만 본다면 스페인이 세계 최대 경작지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서 나오는 와인들은 오래전부터 음식의 풍미를 더하고 전 세계 미식가들의 입을 즐겁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같은 포도농장에서 나오는 와인이라 할지라도 생물이다 보니 항상 균일한 맛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날이 가물거나 그해 기후 조건에 따라 와인맛이 현저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인을 고를 때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어느 지역에서 언제 생산된 와인인가 하는 점이다. 어느 지역에서 나오느냐 만큼이나 중요한 게 어느 해 만들어졌는가다. 당연히 이에 따라 가격 차이도 크게 나타난다. 



가이드 말로는 최고의 와인은 이 지역이 가장 가물었을 때 제작한 와인이 가장 맛있다는 거였다. 물론 그해 생산된 포도가 가장 달달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최악의 조건에서 가장 황홀하고 맛있는 와인이 나온다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들리는 이 말은 끈질긴 생명의 위대함과 자연의 신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포도가 살고자 하는 욕망이 바짝 마른땅에서 죽지 않고 버티게 하는 힘이자 가장 달콤한 포도를 만드는 비법인 셈이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인간도 가장 힘들고 절망스러울 때 어쩌면 인생에서 빛나는 순간이 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말에 가장 어울리는 화가 한 명이 떠올랐다. 


평생 수많은 작품을 그렸음에도 살아생전에는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팔 수 있었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역시 메마른 땅에서 최고의 와인을 생산한 포도나무와 닮아 있다. 그는 자신을 괴롭혔던 가난과 사람들의 멸시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작품에 매달렸다. 이렇게 해서 만든 꿈틀거리는 듯한 독특한 붓터치와 강렬한 색채가 만들어내는 그림세계는 고흐를 대변하는 상징과 같다. 하지만 그는 평생 동안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그의 노력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는 파리를 떠나 빛의 도시라 불리는 아를에서 <밤의 카페 테라스>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뛰어난 작품도 얻었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수용될 정도 정신이 피폐한 상태였다. 상처받고 무너진 고흐를 반겨준 것은 오베르의 넓은 밀밭과 풍요로운 자연이었다. 


자살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 전 머물렀던 파리 근교의 오베르에서 그는 화가로서의 마지막 삶을 불살랐다. 그는 그곳에서 머물면서 <까마귀가 나는 밀밭>, <오베르 교회> 등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불과 70여 일 머무는 동안 그린 작품이 100여 점에 달한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을 살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가장 피폐하고 메마른 시절, 자기 삶의 마지막을 쥐어짜서 절창이라 불릴 수 있는 뛰어난 그림으로 표출해 낸 고흐야말로 내가 살면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포도나무가 아닐까 한다. 그를 보면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밀도이며, 얼마나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라는 게 실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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