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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Apr 04. 2024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누구나 살다 보면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한두 번은 겪게 된다. 가족이 먼저 세상을 떠나가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안 좋은 일에 연루되거나 등등. 하늘이 무너진다거나 산속에 들어가 죽음을 떠올렸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가 먼저 떠오른다. 그냥 하는 말은 없다. 우리가 귀 기울여 듣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살하기 전에 여러 징후가 있다고 한다. 큰 재해가 발생하기 전에도 사소한 징후들이 나타난다. 지진이 나기 전이나 화산이 폭발하기 전에 동물들이 먼저 알아차린다고 하지 않는가. 다만 그때는 무시했을 뿐이다.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때 이상하기는 했어,” “눈이 뒤짚혔었다니까”와 같은 말은 후일 들려오는 후일담이다. 


어떤 말은 절대로 흘려들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그냥 무심히 들어야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농담 같은 말도 있다. 우리는 매번 진실하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말이 중요한 것은 정말 밑바닥까지 갔을 때 진솔하게 터져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장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만큼이며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 

본인이 상황을 감당할 수 없으면 몇 가지가 발생한다. 일단 숨 쉬기도 힘들고 온몸의 힘이 쭉 빠진다. 눈앞에 캄캄해졌다는 말처럼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호흡 곤란을 겪는다거나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은 다반사이다. 급격한 스트레스는 몸의 모든 기능을 순식간에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부모님과 배우자나 자식을 잃거나 이혼 등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면 마음이 먼저 반응하고 몸이 뒤따라 반응을 보인다. 


우리가 돈 잃고 사람 잃고 건강까지 잃는다는 말을 하는 이유이다. 건강할 때는 모른다. 우리에게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하지만 병원에 누워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하루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부터 매 순간 만나는 일들이 감사로 다가온다.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꽃 한 송이, 불어오는 바람, 파란 하늘. 혹시 날이 흐리거나 비가 와도 좋다. 살아 있으니까 그걸로 된 것이다.  한마디로 눈앞에서 기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극한의 상황이 닥쳤을 때,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냐고 원망하고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밥 생각도 나지 않는다. 시간은 정지되고 잘못했던 후회만 남는다. 그때 하지 말았어야 라는 뒤늦은 반성이 사로잡는다. 분명 어제와 같은 오늘인데도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잠자리에 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자다가도 억울해서 벌떡 일어난다. 


그동안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이고 헛살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디로 도망치거나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나만 사라지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이며 자기만 쳐다보는 일인지는 자기만 모를 뿐 다른 이들은 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자기 손을 떠났지만 그다음 대응은 할 수 있다. 이때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자기에게 어떤 충격파가 던져졌을 때,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느냐 아니면 이를 딛고 일어서느냐가 그동안 쌓아온 내공이다. 내공이 있는 이라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어떻게 기회로 만들 것인가 고민한다. 누군가에게는 절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게 또 다른 기회이자 희망이 될 수도 있다. 


적절하게 대응해야 하는 초기에 무너지면 쉽게 회복하지 못한다. 그대로 몇 개월, 몇 년을 허송세월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시간을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노력하기에 따라 어느 정도 극복할 수도 있다. 걷다가 안되면 자전거를 타거나 오토바이, 자동차, 기차, 비행기를 타서라도 해결할 방법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놓친 버스만을 생각한다. 다른 방법을 강구하면 해결책이 있는데도 눈앞의 상황에만 빠져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럴 때일수록 더 단단해져야 한다. 지금은 위기 상황이며,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때야말로 주변에 도움을 청할 때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고, 훨씬 나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눈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조금 시야를 넓혀 보면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은 그걸 할 수 있다. 그러니 도움을 요청하라. 당신이 그걸 요청했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다. 혹시라도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다시 시작하자.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당신이 죽는다고 해도, 사라진다고 해도 세상에 무슨 변화가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달라지자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지금도 변치 않는 진리인 것은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달라진 것일 뿐인데도 어제와는 분명히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내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변화는 없다. 그러니 달려져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우선 당장에는 밥이 넘어가지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해야 한다. 그래야 산다. 살 수 있다.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이유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이틀이 있다고 한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도 그에 해당하겠지만 ‘어제’와 ‘내일’이 이에 해당한다.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 할지라도 어제와 내일을 붙잡을 수는 없다. 그러니 당신에게 남은 오늘을 사랑하라. 

언제까지나 바닥만 보면서 살 수는 없다. 가끔 쳐다보는 하늘이 눈앞에 있다. 당신이 고개를 숙이고 사느라 그 하늘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니 희망을 품자. 다만 막연한 희망이 아닌 자신이 할 수 있는 시한을 정하고, 그다음 펼쳐질 미래를 떠올리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말인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변함없는 진리이다. 지금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무게의 짐도 시간이 지나면 가벼워진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도 남편에 이어 사랑했던 아들을 황망히 앞세운 후, 한동안 황폐한 삶을 살았다. 그 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린 건 한참 후였다. 

신은 우리에게 감당할 만큼의 짐만 주신다는 말이 있다. 당신이 겪고 있는 무게가 얼마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게가 죽을 때까지 동일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견딘다. 그리고 내일을 맞이할 용기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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