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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Jul 04. 2024

언젠가 이 글을 쓰고 싶었다

 

브런치 연재를 하면서 가끔 확신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흔히 글을 써서 세상에 내보내는 순간 작가의 손아귀를 떠나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말을 한다. 그것은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 공적인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 불확실성과 애매함이 끼어든다. 내가 쓴 글을 누군가 읽는다는 의미는 세상과 소통한다는 뜻이고, 어쩌면 그건 글을 쓴 내 의도와는 다른 식으로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작가들은 독자의 반응이 궁금하다. 이건 작가만에 국한하지는 않는다. 그가 쓴 글에 대해 독자가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해도 내심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만약 마음에 드는 옷을 사서 외출하는 심정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그 옷은 옷장으로 직행할 것이다. 만약 반대라면 그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해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감독도 영화를 찍은 후 흥행에 성공할지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고 한다. 과연 관객이 얼마나 들지, 영화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신을 가지고 영화를 찍어도 관객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상영관에 오래 걸리지 못한다. 몇 개월 또는 몇 년 고생을 해서 찍은 영화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심약한 작가에게 독자의 부정적인 반응은 치명적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상처를 받고 더 이상을 글을 쓰지 않은 이도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상처를 준 독자는 언제나 존재했다. 심지어 비난하고 욕설을 퍼붓고 죽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작가를 핍박한 건 독자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정권의 압박, 도덕이나 윤리도 한몫 단단히 했다. 군사정권 시절, 검열로 수난을 받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지인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인생이 망가진 이도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강렬한 충격은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평생 사회부적응자로 살면서 피폐해진 심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끝끝내 하늘의 별이 되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처럼 그들에게 가해진 혹독한 형벌은 남들과 같은 삶을 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일부 작가들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웠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삶은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그들이 지켜야 할 신념이나 의리는 또 다른 영역에 속해 있었다. 일제시절 친일문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당시를 살아보지 않은 이들의 입장에서 무책임하게 던지는 말은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절필하거나 타협한 이들은 더 많을 것이다. 인생에는 쉬운 법이 없다.      


한때 소설가 정비석이 신문에 <자유부인>을 연재할 때 난리가 났었다. 심지어 이 작품이 중공군보다 더 위험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마광수 작가의 <즐거운 사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마광수는 학교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빚은 결과는 끔찍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게 사회문제로 뜨거운 이슈였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최근 나는 블로그에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다. 한 달 전부터 새로운 블로그를 만들어서 여행기를 쓰고 있다. 보통 하루에 20~30명 정도가 댓글을 남긴다. 우리는 카톡을 봐도, 블로그 글을 봐도 이모티콘 하나 남기는 것도 인색하다. 그래서인지 가끔 영혼 없는 느낌이 있는 글도 있지만 어떤 글은 나를 들뜨게 만들기도 한다.      



그동안 여행잡지에 글을 몇 년 동안 연재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을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편집장이나 대표 말로는 사람들이 기사를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그게 인사치레인지 진짜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블로그의 댓글 역시 진실이 아닐 수 있지만 내심으로는 그게 진실이라고 믿기로 했다. 내가 댓글의 진위여부를 따진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끔 우리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게 얼마나 형편없는지 망각한다. 때로 우리는 그걸 트렌드라 부르기도 하고 대세라는 말로 치장하기도 한다. 눈으로 봤다고, 내가 직접 경험했다고 맹신하기도 한다. 그게 사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 이면에는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어떤가. 모든 사람이 내 편일 수는 없다.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가 내 편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 줄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있는 한 당신은 살 이유가 충분하다. 그 이유 때문에라도 그냥이 아니라 아주 잘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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