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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당 노동자 Nov 15. 2019

수능,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공정성



수능이 끝났다. 


매번 이맘때쯤이면 그때의 참 초라했던 내 모습이 생각나 위로를 건네주고 싶어 진다.


수능을 망쳐도 보았고, 다시 수능을 보기도 해 봤다. 시험이 끝나고 어둑해진 교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의 품으로 달려가 안겨서 펑펑 울기도 해 봤다. 인생이 망한 거 같은 무력감에 한참을 방황하기도 했다. 그때의 일기장을 펼쳐보면 패배감과 우울감의 감정만 가득한 배설 글 투성이다. 





수능의 응시생 숫자가 역대 최저라지만 올해는 특히, 공정성 논란이 더더욱 불거졌던 한 해였다. 그리하여 여전히 좌절감과 패배감을 안게 되는 이들이 더욱 많으리라 생각된다. 그 시절 나와 같은 암흑의 긴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이들이 무수하리라.


물론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인생의 성공에 있어 손톱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엄밀히 따진다면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암흑의 시기를 보낸 지 10년가량이 지난 지금에야 느낀 것을 말해주자면, 그렇다고 해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도 얼마든지 원하는 인생의 성공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 진학을 포기했지만 작은 사업을 시작해 상상할 수 없는 월 매출을 벌어들이며 강연을 다니고 있는 친구도 있고, 스튜어디스가 꿈이었던 친구가 항공운항과에 진학하는 것에 실패했지만 다른 학과에 진학해 열심히 공부하여 결국 스튜어디스의 꿈을 이룬 것도 보았다. 


이밖에 수많은 주변의 사례에서만 보더라도 생각지 않았던 진로를 찾아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성공을 이룬 이들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설정한 방향에 착오가 생겼어도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결국 목표를 이룬 이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여기에서 성공이라는 건 꼭 거창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목표한 뭔가를 이뤘다거나, 목표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더라도 만족감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 등 무수한 형태의 행복한 삶 모두를 의미한다.  





요점은, 어찌 됐든 당장의 점수가 모든 미래의 가능성과, 성공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혹여 좌절감에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경우가 없길 바란다. 


당사자가 보기엔 고리타분한 위로의 말쯤으로 여겨질 것을 잘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렇지만 이것은 정말로 타임머신이 있다면 아까운 시간을 눈물과 우울함으로 흘려보내버린 그때의 나에게 직접 가서 해주고 싶은 진심의 말이다. 그런데 타임머신이란 것은 없으니, 나를 대신해 그때의 내 시간을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 대신 전하는 것이다.  


당장 그때의 성적이 만족스럽지 못해도,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 성적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가진 역량을 찾아 열심히 가꾸어낸다면 원하는 꿈에 가까이 다가갈 기회는 다른 여러 방향으로도 얻을 수 있음을 나 역시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상대평가와 학력주의 사회, 불공정한 출발선 등등 수험생들을 아프게 만드는 것들에는 여러 복합적인 사회 문제들이 얽혀있다. 수험생 시절을 지나 사회인이 된 지금의 나도, 또 다른 이들도 여전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일을 무수히 겪고 있다. 


앞에서 쭉 이야기했듯 개인의 성공을 만드는 방향을 설정하는 건 개인의 영역에 달렸다. 그러나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 많은 복합적인 사회문제들은 단순한 개인의 영역이 아닌 정치의 영역이다. 개인의 한 명의 힘으로는 변화에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식의 개선 등 기타 요소들도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이 많은 것들을 바꾸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법적, 제도적 변화가 분명히 필요하다. 


정치의 영역은 '개인의 영역이 아니기에', '나와 거리가 있어서'라고 생각하며 방관하기에는 그것들이 '나'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지 않은가. 또한 개인의 요구가 모이고 모여, 사회적 요구가 될 때에 그것은 곧 정치의 영역이 된다. 가깝게는 지난날 광장으로 나온 개인 한 명 한 명의 촛불이 모여 거대한 횃불이 되었을 때, 그것이 곧 사회적 요구가 되어 변화를 이룩하는 광경을 우리는 직접 목도한 바가 있지 않은가?   


이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사회가 조금이라도 공정한 방향으로 바뀌어나갈 수 있도록 정치에 '내 요구'를 조금 더 반영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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