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옷이 젖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거세게 내리던 빗줄기는 점점 잦아들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맑게 개었습니다. 고운 빛깔의 무지개와 함께요. 너무나도 싹 바뀐 하늘의 표정에 어이가 없다가도 그 모습이 너무 예뻐 결국 카메라를 들고야 말았습니다. 이렇게 항상 예쁜 날만, 밝은 날만 있으면 좋으련만, 직장의 날씨는 변화무쌍합니다.
오늘의 날씨 맑음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테이크아웃해 걸으며,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노란 햇빛을 즐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쓴 글이, 촬영한 이미지가 잘 나와 만족스러울 때, 저는 마치 그런 기분이 듭니다. 그렇게 나온 컨텐츠들이 팀 내에서, 그리고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땐 더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맞지 않는 테트리스 블록처럼 업무가 마구 쏟아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정신줄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침착하게 차근차근 블록을 맞는 자리에 배치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기다림 끝에 마침내 나온 긴 막대기 하나를 가운데에 꽂아 모든 블록을 한번에 클리어할 때, 저는 결승선을 통과한듯한 후련함을 느낍니다. 결승선 너머, 숨은 아직 차지만 땀방울을 시원하게 식혀주는 바람을 맞이하는 느낌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게 급한 일도 없고, 마음의 짐도 없고, 워킹타임내에 여유롭게 끝낼 수 있을 정도의 일이 있는 날은 대부분 날씨가 좋습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탁 트이는 새파란 하늘, 그리고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바람에 몸을 싣고 유유히 헤엄치는 하얗고 몽글몽글한 구름을 지켜보는듯한 기분이 듭니다.
좋은 공간이나 전시가 열리면, 저희 팀은 때때로 전시를 보러 단체로 출동하곤 합니다. 빽빽한 스케줄러 속 업무를 잠시 잊은 채, 낯선 공간과 작품이 주는 자극을 마음껏 흡수합니다. 머리와 마음 모두가 말랑해지는 시간, 저는 이 시간을 참 좋아합니다. 마치 주말 오후 여유롭게 한강공원에 앉아, 물 위로 찰랑이는 햇빛의 반짝임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회색빛 구름이 자욱한 날
숨 막히는 듯한 무거운 공기가 회의실을 감쌀 때, 몸도 괜스레 움츠러듭니다. 떨어지는 무거운 머리를 받치려 손을 턱에 괴고,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려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학 4년 내내 기획하는 법을 배워왔건만, 대체 왜 내 기획실력은 늘지 않는 건지, 생각의 깊이는 어찌나 얕으며, 넓이는 어찌나 좁은지... 이런 제 모습을 볼 때면 회색빛 구름이 자욱한 하늘을 보는 듯합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사무실에서 왠지 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어디선가 일이 터진 거지요. 그럴 땐 웃음을 거두고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사태를 파악합니다. 타오르는 불길 옆에서 괜히 서성이다가 불똥 맞지 않도록, 평소보다 업무도 꼼꼼히 처리해야 합니다. 괜스레 눈치 보게 되는 어두운 날, 저는 이런 날이 싫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비가 오는 날, 사무실 분위기는 물먹은 듯 축 처집니다. 따뜻한 자연광이 아닌, 차가운 형광등 불빛으로만 가득한 사무실은 불을 모두 켜도 어두운 느낌이 듭니다. 창문에 부딪혀 주르륵 흘러내리는 빗방울에 괜히 우울해집니다. 포근한 이불 속이 몹시 그리운 날, 당장이라도 집에 달려가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비 온 뒤 맑음
일을 하다 보면 모든 것에 화가 치미는 때가 있습니다. 우르르 쾅쾅, 마음속에서는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합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거슬리고, '이 사람은 과연 이게 괜찮다고 생각해서 보낸 걸까?’, ‘일을 이렇게 대충할 수 있나?’, ‘생각은 하고 보내는 걸까?' 등등 온갖 생각에 휩싸여 화가 치밉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는 천둥번개가 오래 이어질 수 없는 곳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결과물을 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비구름을 동반하는 여느 천둥번개처럼 쾅쾅 내리치다가도 이내 까만 구름에 섞여 우울함을 비와 함께 흘려보냅니다.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을 담아 불편했던 곳들에 하나하나 메모를 남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있었던 그림을 차곡히 글로 쌓아 메일을 보냅니다.
이렇게 함께 일하는 파트너와 손발이 맞지 않을 때, 그래서 우리의 일은 산으로 가고, 내 일은 배가 되고, 퇴근 시간은 늦어져만 갈 때, 저는 점점 슬퍼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 홀로 자리를 지키며 '나는 지금 왜 이러고 있나….' 하며 숨 가빠할 때면, 슬픔이 가득 차올라 비처럼 쏟아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시간을 견디고서야 완성된 것들이 좋은 성과를 낼 때면 뿌듯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아려옵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에 훌쩍 성장한 내 모습을 비춰보며 대견하다고 토닥이다가도, 꼭 이렇게 힘들게 자랐어야만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비 온 뒤 하늘이 갠다는 말,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비 오는 것 자체가 싫거든요. 하지만 우중충하고 잔뜩 심통이 난 회색빛 하늘이 있기에, 맑고 화창한 푸른빛 하늘에 더 감사할 수 있는 거겠지요? 비가 온 뒤에야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거겠지요? 왜 슬픔과 기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