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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아 Apr 05. 2020

What's your color?

당신은 어떤 빛깔의 직장인인가요?

Yellow


나른한 기운이 사무실을 감싸는 오후 3시, 해야 할 일은 아직 그대로 쌓여있지만, 몸은 물먹은 스펀지처럼 축 처지는 시간이지요. 그럴 때 저는 저만의 비장의 무기를 꺼냅니다. 바로 발포 비타민.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유리잔에 찬물을 한 컵 담아, 그 안에 툭 하고 발포 비타민 한 알을 넣습니다.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보글보글, 톡톡 튀어 오르는 소리가 적막한 사무실 사이를 뚫고 귓가에 기분 좋게 들려옵니다. 노란 빛깔이 컵 안 가득 메울 때면 상큼한 빛깔을 잠시나마 응시하곤, 재빨리 한입을 들이킵니다.


상큼함 한 모금을 넘기고 주위를 둘러봅니다. 흘러내릴 듯이 의자에 기대어 겨우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는 선배, 그 옆에 장맛비 내리듯 폭풍 타자를 치며, 모니터를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는 또 다른 선배가 보이네요. 슬쩍 다가가 비타민을 하나씩 건넵니다. 깊은 물속에서 올라와 참았던 숨을 내뱉듯 선배들의 표정도 풀리고, 잠시간의 여유가 찾아옵니다.


아쉽게도 그 여유가 길진 않습니다. 비타민이 물 속에서 다 녹아들 때 즈음이면, 다들 한 모금을 머금으며 이내 자신의 업무 속으로 다시 빠져듭니다. 다시 깊은 잠수가 시작되는 거죠. 임무를 완수한 막내는 뿌듯한 표정으로 자리에 총총 돌아갑니다.


밝은색. 분명한 듯하지만, 강한 색을 만났을 때 부드럽게 풀어지며 어우러질 수 있는 색, 노랑. 저는 팀 내에서 노랑을 맡고 있습니다. 특유의 밝음 덕분에 다른 팀분들은 저를 선명한 노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톡톡튀는 노랑보다는 은은한 연노란색에 가깝습니다. 밝기는 하지만, 그 색이 연해서 아직은 많이 서툴고, 투명히 비치거든요.


저는 사회생활도, 업무도, 아직은 처음인 것들이 더 많아 서투른 노란빛 막내입니다. 저는 밝은 편이긴 하지만, 여느 날렵한 막내들처럼 분위기를 띄우고, 눈치껏 윗분들의 입맛에 맞는 멘트와 웃음을 던지지는 못합니다. 식당에서 수저 세팅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술잔이 비지 않도록 채워놓는 스킬은 아직 부족합니다. 회식 자리 같은 곳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어디까지 해야 할지도 아직 잘 몰라 괜히 더 조용해지곤 합니다.


그렇다고 아직 업무에 능숙한 것도 아닙니다. 빨리 쳐내야 할 건 빠르게 쳐내고, 중요치 않은 업무들은 뭉개기도 하고, 때로는 누가 우리 막내 일 시키냐며 다른 팀으로 일을 훅 넘겨주시기도 하는 노련하고 든든한 선배들을 보며 제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감탄뿐이었습니다.


빨강과 노랑을 오고 가며 노련한 '주황빛'을 띠는 선배들은 제게 동경의 대상입니다. 자신만의 색을 내보이며 업무도 능숙하게 쳐내고, 주변까지 따스하게 살피는 선배들을 보며 '나도 언젠간 저렇게 노련한 주황빛 '어른'이 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곤 했죠. 선배들에 비하면 저는 아직 색이라고 할 수도 없는 미비한 색을 가진 사람이니까요.


그럼에도 제가 노란빛을 띠고 있을 수 있는 건 미숙함마저도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그 시선이 투명함에 색을 입혀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도 그 다정한 시선이 감사해서, 막내는 이렇게 작은 비타민으로나마 수줍은 마음을 전해봅니다.






Black & White


저의 하루는 주로 블랙으로 시작해 화이트로 끝이 납니다.


"희망 가득 한 아름 안고서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종점임을 알리는 신나는 멜로디의 음악이 울리면 잠들어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노래 가사와는 다르게 희망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의 사람들을 열차 밖으로 등 떠미는 멜로디를 뒤로하며 저도 흐느적흐느적 역을 벗어납니다. 시간을 보니 아직 여유가 있네요. 원래 나가던 출구 대신 방향을 틀어 다른 출구로 향합니다. 그곳엔 제가 방앗간처럼 들르는 카페가 있습니다.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섬과 동시에 '아메리카노'를 주문합니다. 따뜻한 커피가 한가득 담긴 컵을 받아드니 향긋한 커피향이 기분 좋게 코 끝을 스칩니다. 조금은 즐거운 출근길이 되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감도는 오전 8시 반, 자리에 앉아 새까만 커피를 한 모금 넘기면 이제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할 시간입니다. 까만 테의 동그란 안경을 쓰고, 하얀 스케줄러를 폅니다. 딸깍, 검정색 펜을 집어 들고 어제 못다 한 일,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쭉 정리합니다. 이내 하얗던 빈칸이 까맣게 꽉 채워지죠. 이렇게 까만 스케줄러를 하나씩 지워 하얗게 리셋하면 오늘 하루는 끝이 날 겁니다.


제 스케줄러는 꽤 빽빽하게 차 있습니다. 큼직한 업무들부터 정말 사소한 업무들까지 몽땅 적혀있죠. 이 스케줄러가 사라진다면, 아마 저는 업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겁니다. (으... 상상도 하기 싫네요.) 어쩌면 스케줄이 적혀있는 약 일주일간은 뭔가 빠뜨린 건 없을지 불안감에 시달리며 보내겠죠.


주변의 너무 많은 자극들 때문에, 회사에선 왜인지 자꾸만 집중력이 흐려지는 기분입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흐름에 쓸려가다 보면, 뭔가 빠뜨린 느낌이 들죠. 마치 ADHD가 된 느낌. 그때 필요한 건 바로 스케줄러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해야 할 모든 일은 (그게 사소한 일일지라도) 모두 스케줄러에 적어놓습니다. 그래야 다른 흐름에 휩쓸렸다가도 본류로 돌아올 수 있거든요. 그렇기에 제 스케줄러는 대부분의 페이지가 까맣게 차 있습니다.


까만 스케줄러를 본 사람들은 저를 '꼼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까만색 역시 저의 색이긴 하지만, 이건 회사 한정 컬러입니다. 사실 회사 밖의 제 모습은 오히려 그 반대인,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흰 스케줄러에 가까우니까요. 회사 밖에서 저는 꽤 허술합니다. 업무 외에 개인적으로 챙겨야 할 것들은 빠뜨리기 일쑤거든요. 이런 제 모습을 알기에 저는 저를 믿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일들에 있어선 하얀 빈틈이 있어도 되지만, 회사에서 그래서는 안 되기에, 저는 오늘도 하얀 제 모습을 까만 글씨들로 채워봅니다. 이렇게 채워진 업무들을 하나씩 그어가며, 하얗게 불태우면 저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오늘도 까맣게 시작해 하얗게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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