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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아 Apr 05. 2020

'일복이 많은 사람'은 따로 있는 걸까요?

'업무 자석'이 있다면 그건 아마 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들어가기만 하면, 그 팀에 그리고 저한테 일이 다가와 철썩철썩 붙습니다. 두 번의 인턴, 그리고 지금의 직장에서까지 말이죠.


모두 제가 없을 때까진 여유로웠다가도, 제가 들어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일이 몰려오는 이 현상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물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리가 나고, 그 자리를 제가 메꾸게 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제가 들어간 타이밍에 제게 떨어진 업무량은 솔직히 좀 비정상적이었습니다.






조금은 혹독했던 나의 첫 사회생활


한 홍보대행사에서 시작한 인턴 생활의 첫 한 달은 제가 꼽는 인생 최고의 암흑기입니다. 난생처음으로 '회사'라는 곳에 출근하던 날을 기억합니다. 설렘 반 긴장 반의 마음으로 단정히 정장을 차려입고, 안 신던 구두까지 신고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힘차게 내디뎠건만, 제 발걸음이 향한 곳은 끝없이 빠져드는 업무의 늪이었습니다. 걸음을 내딛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새도 없이 저를 잡아끄는 업무의 늪에 완전히 매몰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출근 첫날부터 10개 브랜드의 월간보고서를 작성하는 업무가 떨어졌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단 5일, 당장 그 주 안에 모두 작성 완료되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설상가상, 제 사수님은 미디어 라운딩으로 자리에 계시지 않았고, 이미 충분히 각자의 일에 치이고 있는 다른 팀원들은 이전의 보고서 양식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는 가이드만을 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폭풍처럼 몰아치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시곗바늘은 한 바퀴도 더 돌아 있었습니다. 참으로 길었던 첫 출근날이었죠.

유독 길었던 첫 출근날 / 출처_픽사베이


다음날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다른 업무들이 더 주어져서 더욱 바빴다는 것 정도? 담당 브랜드의 제품이 뭔지도 모른 채 기자들의 요청이 들어오는 즉시 제품 협찬을 보내고, 남는 시간에는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이 매거진을 빠르게 넘기며 제품이 나온 부분을 클리핑해, 이를 보고자료로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모든 것이 낯설었기에 손은 느렸고, 일은 줄지 않았으며, 실수도 넘쳐났습니다.


공식적인 첫 사회생활, 첫 번째로 주어진 업무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에 휩싸인 불쌍한 인턴은 밥도 먹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고 쉼 없이 일만 했죠. 야근은 기본이고, 집에서까지도 일을 하다 쓰러지듯 잠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허무하게도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버엔딩 업무ㅠㅠ /  출처_픽사베이


하필 또 제가 일했던 곳은 참 차가운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는 누구보다 차가운 사수님을 만났습니다. 처음 온 인턴이 업무의 늪에 빠져 숨도 못 쉬고 헐떡이고 있을 때, 제 사수님은 정시 퇴근했더라죠.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죠. 그녀가 제게 줬던 건 이해와 가이드가 아닌, 왜 보고서를 안 주냐는 독촉과 왜 이렇게 실수가 많냐는 다그침뿐이었습니다. 다그치는 그녀의 앞에서 참을 수 없어 마침내 흘러나온 눈물은 유독 더 뜨거웠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쏟는 인턴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울지 말라고 더 다그쳤습니다. 다른 팀원분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들 대체 언제 퇴근하신 건지, 텅텅 빈 자리들이 괜히 야속해졌습니다. 인사라도 한마디 해주셨으면 덜 서운했을 텐데 말이죠. 이렇게 외롭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홀로 온기 없는 어두운 사무실에 남아 일을 하고 있자니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습니다. 나중에 들었던 이야기지만, 당시 제 낯빛이 얼마나 안 좋았던지 회사 내에서는 새로 온 인턴이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까 하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더군요.


입사하고 맞이한 첫 금요일도 역시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텅 비어있더군요. 동시에 제 머릿속도 텅 비었습니다. 그리고 그 빈 자리는 이내 퇴사 생각으로 가득 차올랐습니다. 심각하게 그만둘까 고민하다 보니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의 첫 번째 사회생활을 이렇게 끝마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일단은 하루만 참아보기로 했습니다. 내일은 토요일이니까요. 마음은 무거울지언정 저도 한숨 돌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짧디짧은 쉼표를 찍은 후 맞이한 다음 주도, 그 다다음 주도 역시 울며 달리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달리고, 눈물을 훔치고, 한숨 돌리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체력과 스킬이 조금씩 붙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눈물은 점차 마르고, 물렀던 자리들은 단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호되게 당했던 눈물의 한 달 덕분에 저는 필사적으로 그다음 사이클을 미리 준비했고, 마침내 3개월 차가 되자 업무를 능숙히 처리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주변에서도 왜 그렇게 갑자기 업무에 급 적응했냐고 물어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아무 아이템도 없이 사회생활이라는 퀘스트에 투입된 Lv.1 인턴은 밤낮없는 플레이를 통해 경험치를 쌓고, 레벨업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돌아보아도 아직 꽤 쓰리고 아픈 기억입니다. 만약 그 시절의 저를 만날 수 있다면, 사무실에 홀로 남아있는 저한테 얼른 집에 가라고,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단기간에 엄청난 레벨업을 이루었던 당시의 경험은 이젠 어딜 가던지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업무를 처리하는 스피드와 스킬을 높여주었고, 이것이 지금의 저의 기반이 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나 혹독했던 두 번째 사회생활


두 번째 인턴 생활 역시 다이나믹했습니다. 인턴이라기보다 유럽 여행에 필요한 용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 개념의 일이었거든요. 유럽 여행 전후로 한 달 반씩, 총 3개월을 근무하고, 3월 개강이 다가오면 퇴사하는 것이 두 번째 인턴의 조건이었습니다. 이미 호된 대행사 생활을 한차례 치르고 난 터라, 새로운 광고대행사에서의 업무는 꽤 수월했습니다. 실장님 한 분과 대리님 한 분, 총 2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대행사라 부담도 없었을뿐더러 업무도 조금만 손을 빠르게 놀리면 해결되는 것들이었거든요.


그렇게 한 달 반간의 즐거운 용돈 벌이를 마치고 유럽 여행을 다녀오니 상황은 바뀌어있었습니다. 그동안 함께 일했던 대리님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3명의 대학생 인턴이 채우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작 7개월 반 정도 일한 경력이 전부였던 제가 4명의 인턴 중 가장 경력자가 되어있었습니다. 클라이언트에게 저를 새로운 사원이라 소개하는 실장님 뒤로 당황스러움을 숨기며, 저는 기존에 대리님이 하던 일들을 쳐내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미팅에 참석하고, 보고하고, 발표하고, 오프라인 행사까지 기획하여 진행하다 보니 악몽의 인턴 생활이 겹쳐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늪에 빠지게 된 거죠. 정말 학교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그 늪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겁니다. 개강이 그렇게 반가울 데가 없더군요.






이번엔 괜찮겠지 싶었던 지금의 직장에서도 업무 자석의 법칙은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이쯤 되니 꽤 억울해집니다. 과연, 진짜 일복이 많은 사람은 따로 있는 걸까요? '우리 팀이 원래 이렇게 바쁘진 않았는데...'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와 있는 저한테 다가와 머쓱하게 건네는 팀원들의 말이 이제는 꽤 익숙합니다.


여전히 업무 자석에서 벗어나지 못한 저는 아픈 성장통을 겪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늪에 빠지기만 하는 저를 보며 누군가는 동정하더군요. 물론 저도 의도치 않게 꽤 심하게 겪고 있는 성장통이 야속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철썩철썩 붙는 업무를 하나씩 쳐내다 보니 점점 경험치가 쌓이며, 업무를 담는 그릇 또한 넓어짐을 느낍니다. 또한 지금은 올라가야 할 레벨이 아직 많이  남은 시기임을, 아직은 제 그릇을 넓힐 시기라는 것을 알기에 이 성장통을 묵묵히 견디고 있는 것뿐입니다. 레벨이 올라가면 업무가 그릇 밖으로 넘칠까 걱정하기보단, 저만의 작품을 여유롭게 담아낼 줄 아는 넉넉하고 깊은 그릇이 되겠죠.


그날을 그리며 저는 오늘도 버텨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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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모든 업무 자석들, 오늘도 수고했어요: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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