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 손으로 만든 멸치볶음

by 이양고

엄마가 아팠다. 초등학생의 눈에 엄마는 늘 뭐든지 다 잘하고, 어디서나 씩씩한 어른이었다. 누가 이유 없이 시비를 걸면 따지고 드는 엄마였고, 내가 못 여는 온갖 뚜껑을 한 번에 힘주어 열곤 했다. 강했고, 씩씩했고, 컸다. 그런 엄마가 아팠다.


어린 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병원을 다녀온 이후로도 시름시름 앓기만 하고 도무지 일어나질 못했다. 하루 종일 누워 있었고, 약을 먹기 위해 맛도 없는 흰죽을 삼켰고, 열이 났고, 얼굴에 열꽃이 피었다. 아빠는 일을 나가야 했고, 어린 나는 나보다 더 어린 동생들을 챙겨야 했다.


초등학생이라도 첫째는 첫째였다. 나보다 네 살, 여섯 살 어린 동생들을 책임지고 먹여야 했다. 아빠는 야근이 잦아 언제 올지 몰랐고, 동생들은 배가 고프다며 엄마를 조르다가 엄마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슬그머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들이 무거웠다.


나는 엄마를 도우며 배운 방식대로 밥을 지었다. 엄마는 다섯 식구가 두 끼는 먹을 수 있는 큰 솥에 밥을 앉혔지만, 나는 그 솥을 들기에도 버거웠고 무엇보다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먼지가 소복이 앉아 있는 미니 밥솥을 꺼내 작은 손을 넣어 물 높이를 맞췄다. 엄마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한 건데도 물을 많이 넣은 탓에 밥이 질었다. 손의 크기에 따라 물 높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밥을 보고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삼남매가 한 끼 먹을 정도의 적은 양이라는 것이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많은 양의 쌀을 이렇게 날렸더라면 혼이 났겠지만, 엄마는 아팠고 밥이 엉망이 된 것도 모른 채 누워 있었다. 나는 죽 같은 밥을 두고 고민하다가 계란을 넣어 볶아버렸다. 그나마 물기가 날아가 먹을 만했다.


동생들을 앉혀 놓고 계란과 간장을 넣은 볶음밥을 먹었다. 엄마는 죽을 먹고 다시 잠든 상태였다. 엄마가 언제 괜찮아질까. 지독히도 쓸쓸한 어느 가을 밤이었다.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물을 너무 많이 넣어 밥이 질어졌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자 손등 기준으로 이쯤 넣어보라고 조언해주었다. 엄마가 아프고 나서 아빠는 더 수척해졌다. 변한 건 엄마가 누워 있다는 사실뿐인데, 집은 묘하게 어둠이 장악한 듯 적적했다. TV를 보는 일조차 즐겁지 않았다.


3일 연속 볶음밥을 먹자 지겨웠다. 엄마는 나을 것 같지 않았다. 뭐라도 반찬을 만들어야겠다 싶어 냉장고를 뒤져 멸치를 꺼냈다. 엄마가 반찬이 없을 때면 곧잘 해주시던 멸치볶음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아픈 엄마에게 다가가 만드는 법을 물었다. 멸치를 볶은 뒤 간장 같은 걸로 간을 하면 된다고 띄엄띄엄 설명해주었다. 좀 더 정확히 묻고 싶었지만 엄마는 다시 잠든 듯했다.


그새 익숙해진 몸놀림으로 밥을 앉히고, 멸치를 프라이팬에 쏟아부었다. 엉성한 손으로 멸치를 볶다가 간장을 넣고 설탕을 넣었다. 맛도 엉성했다. 냉장고 한 켠에 있던 고추장을 한 숟가락 퍼 넣었다. 매콤하고 엉성한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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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볶음을 반찬 삼아 밥을 먹었다. 엄마가 며칠째 누워만 있자 냉장고는 텅텅 비어갔다. 장을 보러 가지도 않았고, 반찬이 새로 생기지도 않았다. 설익거나 질은 밥에 엉성한 멸치볶음을 먹으며, 얼른 엄마가 나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멸치가 하나하나 살아 목구멍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슬픔이 목구멍까지 찰랑거리며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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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시간 아프던 엄마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근 한 달을 앓았다. 엄마가 괜찮아지자 아빠도 시름을 덜었다는 듯 얼굴이 환해졌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밥상을 차렸다. 계란말이와 동그랑땡, 김치찌개가 상에 잔뜩 올랐다. 엄마가 만든 밥상은 엉성하지 않고 완벽했다. 우리는 기억 속 저편으로 사라지는 엉성한 멸치볶음의 맛처럼, 엄마가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맛있게 밥숟가락을 들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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