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가서 무 좀 사와

by 이양고

찬 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 날, 우리는 늘 비슷하게 반복되는 식단에 지쳐 있었다. 어쩌면 질렸는지도 모른다. 단백질을 채우기 위한 닭가슴살과 냉동 주먹밥은 우리의 오래된 밥 친구였고, 그게 질리면 집 앞 분식집에서 순대와 떡볶이, 김밥을 사다 먹었다. 그마저도 질릴 땐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때웠고, 월급을 받아 지갑이 두둑할 땐 쌀국수나 마라탕, 짬뽕이나 국밥을 시켜 먹기도 했다.


매번 다른 음식인데도 지겨운 기분이 드는 건, 밖에서 사온 음식들이 늘 같은 강도로 자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먹고 나면 한동안 더부룩함이 친구처럼 따라왔다. 만족감 없이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들에 불과했다.


"막내야, 농협 가서 무 좀 사와."


우리 삼남매는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시외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만 다니는 시골을 벗어나, 내가 가장 먼저 직장과 가까운 도시에 자리를 잡았고 두 동생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면서 함께 산 지도 벌써 5년이 넘었다. 우리 셋은 친구처럼, 때론 가족처럼 즐겁게 지냈고 무엇보다 입맛이 잘 맞았다.


"무는 왜?"


우리 집에서 요리를 가장 잘하는 건 엄마 솜씨를 닮은 둘째다. 내가 스물 살부터 나와 살기 시작하자 엄마의 조수가 되어 이것저것을 배웠는데, 그 이후로 겨울만 되면 뭇국이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오늘은 기어코 뭇국을 끓일 요량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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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는 둘째의 심부름에 냉큼 집 근처 농협으로 가 튼실한 무를 사왔다. 콩나물이나 두부를 사본 적은 있어도 무를 산 건 처음이라고 했다. 둘째는 이미 퇴근길에 엄마한테 끓이는 법을 전수받아 왔다며 비장하게 부엌으로 향했고, 막내는 그런 둘째를 돕겠다며 따라 들어갔다. 한참 동안 주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둘째는 엄마를 닮아 손이 컸다. 집에서 가장 큰 냄비에 무를 넣고 끓인 모양인지, 한솥 가득 뭇국이 완성됐다.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반가운 마음으로 식탁에 앉자, 뭇국과 제육볶음이 뚝딱 차려져 나왔다.


동생이 끓인 뭇국에서 엄마의 손길이 느껴졌다. 얼큰하고 칼칼하면서도 무가 우러나 시원한 맛이 일품인, 엄마의 뭇국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맛있다며 엄지를 날리자 엄마 솜씨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게 바로 자기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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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는 뭇국보다 제육볶음이 더 맛있는지 젓가락이 자꾸 그쪽으로 향했다. 제육볶음에서는 아빠의 맛이 느껴졌다. 김치와 마늘을 넣어 잡내 없이 깔끔하면서도, 자극적이지만 입맛을 돋우는 맛이었다.


우리는 한 그릇을 싹싹 비우고는 종종 이렇게 해 먹자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리를 한 둘째와 조수 노릇을 한 막내는 좋다며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버렸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자연스럽게 설거지 담당이 됐다. 큰 냄비에 밥그릇 셋, 국그릇 셋, 수저까지 한 가득 쌓인 싱크대를 보자 현기증이 일었다. 아마도 한동안은 요리를 안 하겠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image.png 경상도식 뭇국은 대체로 이런 모습이다.
쓰고 나서야 알게된 사실.
경남에서 나고 자란 우리에게 '뭇국'은 빨간 국물인데,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검색해보니 맑은 국물의 뭇국이 상단에 떴다. 다른 지역에서는 '뭇국'이 붉은 색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 쓰고 나서야 알게 됐다. 이럴 때면 작은 한국땅에 살면서도 같은 이름을 가진 음식의 모양과 맛이 제각각이라는 게 새삼스럽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