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의 나는 홀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원룸 근처의 액세서리점에서 14시부터 22시까지 일을 했다. 돈을 벌겠다고 대학도 휴학한 상태였다. 어린 나이였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미래 앞에 자주 한숨을 내쉬던 시절이었다. 푼돈을 모아 둘째가 스물 살이 되면 같이 살 집의 보증금을 마련하고 있었다. 버는 돈의 반 이상을 적금하고 나면 월세를 내야 했고, 월세를 내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별로 없었다. 그마저도 휴대폰 통신비와 관리비를 내고 나면 고작 푼돈이 남았는데,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샴푸나 생리대 같은 생필품을 사기에도 허덕이는 수준이었다.
어느 날엔가 샴푸가 떨어진 것을 알고도 월급날이 되지 않아 사지 못한 날이 있었다. 구석에 박혀 있던 오이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린스를 했지만 머리가 뻣뻣했고, 하루 종일 푸석푸석했다. 두 번은 맛보고 싶지 않은 가난의 맛이었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용돈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홀로 살겠다고 다짐한 이후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는 장녀답게 생활력이 강했다. 돈을 적게 벌어도 그 돈에 맞게 생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처음에야 샴푸나 폼클렌징, 생리대, 휴지를 사는 것에도 손이 떨렸지만, 정기적으로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계획적으로 쓸 수 있게 되었고, 적금과 월세를 넣고도 생활비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동생은 내 쉬는 날에 맞춰 하교 후 원룸에 찾아오곤 했다. 집에서 만든 반찬을 바리바리 싸 들고서. 어느 날엔 김치를, 또 어느 날엔 두툼한 계란말이를 싸왔다. 동생이 싸온 것만으로 끼니를 때우기엔 부족했다. 월급을 받으면 조금씩 따로 모아두기 시작했다. 동생이 올 때면 맛있는 걸 사주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자주 가던 곳은 집 근처 대패삼겹살집이었다. 1인분에 3,000원짜리 저렴한 곳이었다. 3인분부터 주문이 가능해 딱 그만큼만 시키고, 2,000원짜리 된장찌개와 공깃밥 두 개를 주문했다. 고기를 더 시키기엔 호주머니가 간당간당했다. 동생은 밥그릇 바닥이 보이는데도 젓가락을 놓지 못했다. 더 시켜줄까 물어봤지만 배가 부른데 맛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성급하게 변명했다. 그 말 속에서 가난한 언니를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언니, 계란말이는 내일 점심으로 꼭 챙겨 먹어. 알겠지?"
동생은 혼자 있을 때 밥반찬으로 꺼내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떠났다. 동생이 간 뒤엔 삼각김밥과 계란말이 두 조각을 꺼내 먹었다. 사각형 원룸에는 전자레인지가 없어 햇반을 데울 수가 없었다. 편의점에서 햇반을 돌려 5층까지 올라오는 것도 번거로워, 집기 편한 삼각김밥을 자주 사다 먹었다.
방은 크지 않았다. 동생이랑 나란히 누우면 빈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작은 미니 냉장고, 집에서 챙겨온 상, 전기포트가 바닥에 놓여 있었고, 벽면을 따라 작은 싱크대와 옵션으로 딸린 오래된 가스레인지가 있었다.
동생이 떠나고 나면 작은 방은 괜히 더 허전해 보였다. 허전할 만한 공간도 없는 아주 작은 방인데, 동생이 있다 가고 나니 마음이 공허한 모양이었다. 전주비빔 삼각김밥을 뜯어 계란말이와 함께 먹으며 생각했다. 몇 년 뒤 동생과 함께 살게 되면 작은 밥솥도 사고 전자레인지도 사야겠다고. 그러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요리를 자주 해먹을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