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코 끝에 맴도는 이별의 기척
오늘도 조식으로 시작하는 아침.
계란말이, 깍두기, 감자샐러드, 도토리묵, 닭곰탕으로 든든하고 맛있게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이제 이 조식도 금요일 아침이면 끝이 난다.
순천에 머무는 동안 내 건강함을 책임져주었던 스테이두루의 아침.
끝이라고 생각하니
스테이두루 1층의 풍경도,
9시에 일어나 눈곱만 떼고 내려와 멤버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던 장면도
모두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20일이 넘도록 매일 같이 보던 골목길 끝 간판.
첫째날에도 본 간판인데, 떠날 생각을 하고 보니 하나하나 감성적이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이별이 아쉬운 탓일 것이다.
일정이 없는 날은 주로 두 가지로 나뉜다.
멤버들과 어디론가 다녀오거나, 혼자서 글을 쓰거나.
오늘은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보기로 했다.
스테이두루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던 꽃도 다시 한 번 보고,
경계선이 명확한 뭉게구름도 괜히 아쉬운 마음에 오래 쳐다보고.
잠깐만 야외에 있어도 땀이 뻘뻘 나던 여름에 찾아왔던 순천은,
어느새 코앞까지 가을이 다가와 있다.
그건 곧 순천을 떠날 날이 성큼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점심을 먹은 뒤 찾아간 곳은 내내 가보고 싶었던 '책방 서성이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북토크도 열리고,
여러 모임도 자주 열린다고 한다.
내가 순천에 정착하게 된다면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 듯 자주 들르지 않을까 싶었던 곳이다.
공간이 넓지는 않지만 책이 꽤 많은 편이었고,
덕분에 잠깐 머무는 동안 책을 훑어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전자책도 구독하지만
종이책은 종이책만의 안정감을 준다.
전자책 리더기나 아이패드, 휴대폰으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내게 만족감을 주는 책.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쩐지 옛날 사람 같아 보이지만
아무리 많은 텍스트를 휴대폰이나 노트북으로 보더라도
종이책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비교할 바가 안 된다.
그런 이유에서,
책방 '서성이다'를 기억하고 싶어서
책 한 권을 구매했다.
제목은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한영옥 시인의 시집이다.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고 나왔는데도 아직 하늘이 청량하다.
브런치에도 몇 번 글을 썼듯이 나는 길치인데,
그 탓에 문화의 거리가 엄청 먼 곳에 있는 줄 알고
제대로 둘러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렇게 가까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부지런히 돌아다녀볼걸.
꼭 끝날 때가 되어서야 이렇게 아쉬운 것들이 투성이인지.
첫째주,
두드림 영상 미디어 센터에 영화를 보러 왔더랬다.
'두드림'에서는 정기 상영을 포함해서
특별상영, 공동체상영 등 영화 관람을 지원하기 때문에
순천에 지내면서 적어도 두 번은 영화를 보러 오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순천은 생각보다 보고 즐길 것이 많아
첫째주 이후로 이 근처에 올 일이 없었다.
이 또한 아쉬운 일.
스테이두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드림이라는 좋은 곳이 있어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마음껏 즐기지 못했다니.
어쨌든 책방 근처에 두드림이 있어 들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보게 된 고양이 "재복이"
가방에 챙겨다니던 트릿을 주었는데 냄새만 맡더니
관심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려 앉았다.
집도 있고 밥그릇도 있는 걸 보아하니
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인 듯 했다.
재복아 늘 건강하렴!
홀로 인사를 건네고 나오자
어여쁜 풍경들이 날 반겨준다.
복합문화공간인 한옥글방도,
거울에 비치던 청량한 하늘도
모두 순천에서의 기억이 좋은 기억으로 남으면 좋겠다는 듯
한껏 예쁜 자태를 뽐낸다.
걱정마 나는 아마 오랫동안 순천에 대한 좋은 추억을 잊지 못할 거야.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예쁜 카페도 보고, 여름에 핀다는 능소화도 실컷 구경하고.
지도를 보며 스테이두루로 찾아가고 있는데,
관광객인 나를 알아차린 모양인지
어떤 아저씨께서 길은 나한테 물어봐! 하시기에
터미널 쪽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해요? 여쭤봤더니
여러 갈래 중 한 길을 가리키며
이 길 따라 쭉! 내려가라 하셨다.
출출하다 생각했다 생각했는데
어느덧 시간이 17시가 넘어있었다.
뜨끈한 국물 먹고 싶다고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데 발견한 콩나물국밥집.
고기가 들어간 순대국밥, 돼지국밥도 좋아하지만
속이 편안한 콩나물 국밥도 몹시 좋아하는데
때마침 발견한 콩나물 국밥이 맛집의 향기를 강하게 풍겨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옴팡골 콩나물국밥은
'콩나물국밥 전문점' 답게 콩나물국밥만 판다.
예전에 둘째 순이랑
콩나물국밥과 모주를 즐겨 먹던 기억이 있어
모주를 한 잔만 시키고 싶었지만
병으로만 판다고 하여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콩나물 국밥" 하나만 주문했다.
잠시 후 등장한 콩나물국밥.
계란도 두 개나 주시고, 김가루도 따로 준비해주셔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난 수란에 뜨거운 국물을 넣어 따로 익히면서
콩나물 국밥의 콩나물부터 먹기 시작했다.
콩나물을 어느 정도 건져먹은 뒤에는
약간 익은 수란과 김가루를 넣어 밥과 함께 비벼 먹었는데
한 가지 음식으로 여러 가지 맛을 느낄 수 있어
아주 만족스러운 한끼였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순이가 없었다는 사실.
순이가 있었더라면
콩나물국밥을 안주 삼아 모주를 곁들여 먹었을 텐데.
여행자의 마음으로 산다는 건
아주 일상적인 풍경도 어여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분명 내가 사는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법한 풍경들을
애정을 담아 사진에 담고
그 앞에 서서 몇 초간 눈과 마음에도 담는 것.
여행자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
숙소로 돌아오니 다들 1층에 앉아
목요일에 있을 성과발표회를 준비하고 있다.
나는 아카이빙은 이미 완성했지만
멤버들 사이에 껴서 어떻게 발표를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다가
남원 친구랑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이제 순천의 밤거리를 마음껏 보는 것 또한 마지막이겠지.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데,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시선이 가는 모든 것에 애틋함이 담긴다.
나는 남원 친구와 처음부터 결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무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게
처음부터 그렇게 느꼈다.
혹시 그게 나만의 생각인가 싶어 남원 친구한테 물어보니
남원 친구 또한 그렇게 느꼈다고 했다.
결이 잘 맞는다는 건 뭘까.
말하지 않아도 결이 맞다는 걸 알 수 있고
침묵 속에 있어도 어색하지가 않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축복과도 같은 일.
한 시간 넘게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아까보다 더 많은 멤버들이 1층에 앉아 노트북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남원 친구와 나도 그 사이에 껴서 노트북 작업을 했다.
작업을 하고 있노라니 룸메 지혜가 티 스파클링과 냉침한 티를 함께 마시자며 들고 와 나눠마셨다.
오늘 밤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순천 한달살이가 이렇게 조용히, 천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