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이야기>
김범수의 보고싶다만 들으면 아직까지 눈물이 난다.
보고싶다는 여러가지로 나에게 의미 있는 곡이다.
홈스테이 생활이 힘들고 지칠때 MP3에 보고싶다를 틀고 냅다 달리러 나갔던 날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때는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나갔었다.
밖을 뛰는 순간만이 오로지 내가 "내"가 되는 순간이었었다.
우리 부모가 아닌 다른 부모와
그것도 수많은 아이들과 같은 집에 한때 어울려져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홈스테이 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너그러우신 분들이 아니었다.
아저씨는 매우 결벽주의자셨고 청소를 정말 많이 시키셨었다.
예를 들면, 외출 후에는 무조건 차 세차를 시키셨고
우리가 청소를 했는지 안했는지 검사할 때
서랍장까지 들쳐 보셨었다.
두분은 그리고 정말 엄격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한번은 외출 후 차에서 내리기 전에
"라이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몇시간을 혼났던 적이 있다.
기본 예절을 중요시 해서 그렇겠지라고 지금은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서러웠었다.
훗날, 우리 부모님의 차를 타고 내릴때 "라이드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날의 상처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주인 아주머니, 아저씨의 아들은 더 심각했다.
다혈질의 성격을 갖고 있었고
화가 나면 물건을 집어던지는 못난 버릇을 갖고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에게도 물건을 던졌던 적이 몇번 있었던 것 같다.
부모도 아닌 사람들에게 왜 혼나야하나 싶었고
왜 내가 타국에 와서 이런 심적 어려움을 겪어야 하나 싶었다.
우리 부모님께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미국이 좋았고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선택한 유학길을 그렇게 허무하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방학 때 한국에 가면 유학을 갔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속으로는 슬픈 마음이 가득했었다.
웃으며 정말 좋다고 말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유학을 가라고 권유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보고싶다에 의지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난 못가'
절대 돌아갈 수는 없었다. 보고싶었지만 꿈을 위해 왔고
절대 이루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온 것이라 어쩔 수 없지만, 만일 유학을 정말 꿈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계획한다면 절대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유학은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