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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다 Oct 27. 2024

한류를 빌려 쓰는 한류 연구

"사실 나는 한류 연구자는 아닙니다."


제1회 세계한류대회에 참석한 어느 미국 대학에서 박사를 받은 한 한국인 교수는 말했다. 자신이 이렇게 한류를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영어로 한류 연구를 발표하면 국제적인 한류 연구자가 되는 것일까? 결국 한국이 생산한, 그러나 동아시아가 인정해서 한류라는 이름을 얻은 한류도 또다시 서구에 기댈 때 비로소 학문으로 인정받는 것일까? 이는 한류가 서구의 문화 흐름에 거슬린 문화 역류(cultural counterflow)였지만, 여전히 한류를 설명하는 이론이나 개념은 서구중심주의에 갇히는 것이 아닐까.


1997년 중국에서 <사랑이 뭐길래>로 탄생한 한류가 2003년 일본에서 <겨울연가>로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류를 형성했다. 그 후 2010년 이후 싸이와 BTS,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등으로 서구에 진입하고 팬덤 문화가 아니라 주류 문화에 진입하면서 한류 연구는 새로운 단계를 맞이했다. 과거 대중문화를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지 않던 학자들조차도 이제는 한류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학계에서 새로운 위상을 찾고자 한다. 이는 한류가 얼마나 큰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과연 이러한 연구가 진정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발표되는 많은 한류 연구서는 잘 정돈된 이론서로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한류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하기보다는, 이미 기존에 서구 학계에서 개발된 이론을 적용하여 한류를 설명하는 데 그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한류가 단순히 하나의 사례로 취급되는 경향을 보이며, 독창적인 접근이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 학자들이 한류를 연구하면서도 서구 이론에 의존하는 것은, 한류라는 독특한 문화 현상이 가지고 있는 한국적 맥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를 낳고 있다.


물론 이론은 보편적인 이해를 돕는 데 유용한 도구이다. 하지만 한류라는 현상은 단순히 보편적인 이론에 들어맞는 대상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특정 문화적 맥락 속에서 성장한 독특한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류 연구는 여전히 서구 학계에서 형성된 이론 틀에 갇혀 있으며, 한국적 시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이론적 틀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한류 연구는 현상적인 이해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저 서구 이론의 실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2022, 호찌민


"'국내에서 손꼽히는 한류 연구자'라고 하셔서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했습니다."

"체계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있고, 사회학적 분석이 뛰어납니다."


같은 책, 다른 평이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한류 연구가 늘어가는 지금, 한류 연구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학문적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류를 단순히 '빌려 쓰는' 방식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역사적 맥락, 대중문화의 변화 과정,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문제의식을 반영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한류라는 이름을 '빌려' 학문적 가치를 얻으려는 시도를 반복하게 될 뿐이다.


이는 단순히 학문적인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류가 한국 사회와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이를 통해 한류의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한류 연구는 한류의 현재를 분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류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서구 학계의 이론을 수동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넘어, 한류 현상을 통해 새로운 학문적 개념과 방법론을 창출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한류 연구가 진정한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한류를 단순히 빌려 쓰는 것이 아니라, 한류라는 현상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와 문화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한류 연구는 단순한 '밥벌이'가 아닌, 진정한 학문적 탐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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