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수리 맞기며 탄 택시에서 라디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라디오를 들으며 내다 본 택시 차창 밖에는 하교하는 학생 무리가 보였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생각하다 집 작은방에 놓아둔 작은 상자가 생각났다.
예전에는 나의 모든 것이었지만 어느 순간에선가부터 우선순위에서 밀려 이제는 가끔 찾아봐야 열리는 작은 상자.
추리고 추려서 그나마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만 모아 놓은 작은 상자 안에는 제일 친한 친구와 주고받았던 비밀노트와 일기장, 직접 녹음하고 제목을 적어 둔 공테이프들과 용돈을 모아 샀던 카세트테이프 앨범들 그리고 사진 몇 장이 단촐하게 들어 있다.
따라붙는 기억들과 함께.
별을 보며 학교에 갔다가 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던 고등학교 때
내 낙 중 하나는 자기 전에 라디오를 듣는 거였다.
원래도 아침잠이 많고 밤잠이 없었던지라 새벽에 일어나 학교를 가는 게 너무나도 힘들었는데
그렇게 학교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깊은 밤에 집으로 돌아올 쯤엔 이상하게 말똥말똥해져 버려서
잠이 오지 않아 듣기 시작했던 것이 라디오였다.
여동생과 같이 쓰던 방에서 라디오를 들으려면 이어폰을 껴야 했는데
이어폰을 귀에 끼면 밖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롯이 라디오에서 나는 소리만이 내 마음으로 흘러들었다.
치직치직 동그란 버튼을 돌리며 즐겨 듣던 주파수를 맞추던 시간은 일상을 마무리하는 의식과도 같았다.
지금처럼 핸드폰 어플만 켜면 수많은 음악을 들을 수 있던 시절이 아니라서 더 소중했던 시간들.
방에 누우면 보이는 작은 창으로 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보며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들려오는 음악이 좋으면 준비해 둔 작은 수첩에 노래 제목과 가수 이름을 적어 놓고서 그나마 일찍 학교가 끝나는 토요일에 시내 레코드점에 들러 카세트테이프를 사기도 하고 공테이프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녹음해서 듣기도 하고 선물하기도 하고 그랬던 시절.
새벽 라디오 채널의 마지막 방송은 시간대처럼 조용하고 따뜻한 목소리와 잔잔한 음악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다 듣고 나도 잠이 오지 않을 땐 그날 라디오에서 나왔던 음악들을 생각하며 잠들곤 했었다.
어른도 아이도 아니였던 내가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나름대로 살아내려고 노력하던 그런 시절의 흔적들이 그렇게 작은 상자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노트들과는 달리 들어보고 싶어도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볼 플레이어가 없어서 인터넷으로 하나 구매해 볼까 몇번 고민하다가 그냥 다시 정리해 넣어 두었다.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런 기억들이 많다고 생각했고 테이프를 듣게 되면 그때의 감정이 강하게 밀고 들어와 힘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택시 안 라디오에서 들려오던, 내 작은 상자 안 테이프에도 있는 그 노래는 너무나 따뜻하고 그리운 냄새가 났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외면만 하고 기억하기 싫은 것들이 가득할 것 같았던 그 시절 노래 한곡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인데 반주만으로도 별빛이 쏟아지 듯 내 마음으로 흘러와 매일 밤 라디오를 켜고 행복해했던 내가 생각나게 했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핸드폰을 열어 카세트 플레이어를 고르면서 생각했다.
다시 한번쯤 그때로 돌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
왠지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